2012년 12월 4일 화요일

외할머니




당신은 1928년 남도의 어느 마을에서 유지의 첫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딸이라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어려서 방문 밖으로 들리는 한자책 읽는 소리만을 듣고 전체를 기억할만큼 영특했다고 합니다. 나중 어른들 말씀으론 고등교육을 받았다면 뛰어난 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했지요. 

머리가 좋아 천재로 소문이 났던 오빠는 인물도 훤칠해 많은 동네 처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지만, 그 시대에 태어난 죄인지 아님 너무 영리했기 때문인지 어느날 순사에게 잡혀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꽃다운 열일곱 나이에, 어려서부터 일본에서 고학한 건너 마을 남자를 소개받아 결혼을 했어요. 문밖으로 몰래 훔쳐본 남편감의 모습이 은근히 맘에 들었고, 남편이 될 청년은 일본에서 가져온 화장품과 노리개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두 해가 지나 첫 딸이, 그리고 또 몇 년이 지나 기다리던 첫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당시론 늦게 가진 편이라 정이 많은 남편은 뛸뜻이 기뻐했고, 아이들을 당신 무릎에 앉히다시피 해 키웠지요. 그랬기에 어린 첫째 아들이 무언가를 잘못 먹고 탈이 나 앓기 시작한지 며칠만에 죽었을 때 그 슬픔은 이루말할 수 없었습니다. 

스물셋 나이에 한국 전쟁이 일어났고 마을에서도 군인들 사이의 총질이 있었지만 가족들은 다행히 큰 탈 없이 무사히 종전을 맞았습니다. 그 시대의 여인네들이 그랬지만, 손재주가 뛰어나 남편의 양복을 직접 만들 정도였지요. 음식 솜씨도 좋은데다 손도 커서 명절엔 늘 주변에 음식을 나눠주곤 했었어요. 

첫째 아들을 잃은 뒤 몇 년이 지나 아들 셋, 딸 하나를 더 낳았고, 다행히 아이들은 건강하게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랄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성격을 닮아 반듯하게 자랐고, 하나같이 따뜻하고 성실했지요. 이제 부모로서 해야할 일을 다 했으니 앞으로는 행복하고 평온하게 늙어가리라 생각했습니다. 군 제대를 앞둔 둘째 아들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군용차를 몰다 생긴 교통사고였습니다. 수술실 앞에서 몇 번을 까무라쳤을까. 뇌출혈을 비롯한 외상으로 몇차례 큰 수술을 받은 아들은 목숨은 건졌지만 네살 아이 지능으로 되돌아가버렸고, 이후로는 보호자가 없으면 길을 잃을까봐 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문을 잠궈두어야하는 아이가 되어버렸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마음 속 큰 짐의 무게는 더해갔겠지요. 매달 적지 않은 금액의 연금이 나와 생활에 도움이 되었지만, 쾌활하고 정많던 듬직한 아들을 영영 잃어버린 값이라 생각하면 때론 문득문득 숫자가 찍힌 통장을 찢어버리고픈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한 적은 한번도 없었고, 당신은 항상 따뜻한 어머니이자 할머니였지요. 

세상을 떠난 뒤 남게 될 둘째 아들에 대한 걱정을 부쩍 입밖에 내게 된 건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후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기력이 쇠해 자주 병원 생활을 하면서도 퇴원해 집에 가면 굽은 허리로 늘상 하던 집안일을 억척스레 해낸 것도 남겨질 아들에 대한 걱정때문이었겠지요. 돌아가시기전 마지막 입원 이후엔 이전보다 더 자주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머니와 동생을 끔찍히 돌보던 첫째 아들에게, 남은 동생을 잘 봐 달라고 자주 이야기하셨대요. 음식을 스스로 삼키지 못해 코에서 위로 연결되는 관을 통해 죽을 넣어야했고 눈을 떠있는 시간보다 감고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진 이후에도 꽤 오랜 기간 살아계셨던 건, 끝까지 이생에 대한 끈을 접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신이 없었다면 이 세상에 없었을 미약한 존재가, 이렇게 당신의 삶을 다시 생각하며 그래도 편안히 가시길 염치없이 기도합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만큼 많은 걸 받았지만 아무것도 돌려드리질 못했어요. 


2012.6.30.

2012년 12월 2일 일요일

기억


'응급실에 가야겠어요. 지환이가 혈변을 봤어요.'

아내의 문자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확 들었다.

새벽에 깬 아이는 다시 긴 잠을 자지 않고 울며 보챘다. 태어난지 두해가 되도록 큰 병치레는 커녕 심하게 보채본 적도 없는 아이였다. 어딘가 불편한지 자지러지듯 울음을 터뜨리길 몇 차례, 설사를 하길래 장염이구나 싶었다. 아내가 변 색깔이 좀 이상하다고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이때문에 평소보다 출근 준비가 늦어 마음이 조급해진 아침이었다. 아이를 봐주는 아주머님이 오시자 동네 소아과에 아이를 데리고 가보도록 부탁하고 집을 나섰다. 아내의 문자를 받은건 사람들 사이에 꽉 끼어 한발짝 옆으로 내디디기도 힘든 출근길 2호선 지하철 안에서였다.

아주머님의 연락을 받은 아내는 출근 도중에 집으로 다시 돌아간 상황이었다. 왜 좀더 주의깊게 살펴보지 않았을까. 기저귀 색깔이 평소와 다르다고 했을 때 바로 확인했어야 했다. 휴대폰 액정에 선명하게 찍힌 '혈변'이란 단어는 후회와 함께 한동안 잊고있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십년쯤 전이었다. 나는 전공의 1년차였고, 그날은 첫 파견 병원에서 한달간의 소아과 근무를 마치는 마지막 주말이었다. 병동 당직 근무를 하며 응급실에 오는 소아 환자에 대한 호출을 받아야했다. 2차병원의 특성상 병동엔 폐렴이나 장염 등의 단기 입원 환자들이 많았고 몇번의 응급실 당직 근무 때에도 상태가 위중한 아이는 없었다. 비교적 평온한 한달이었다. 적어도 그날 응급실에서 그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봄날의 토요일 오후였고, 바깥의 날씨는 너무나 좋았다. 응급실은 여느때와 같이 환자들로 가득했지만, 날씨 때문인지 고즈넉하게 느껴졌다. 철제 침대에 누운 여자 아이는 초등학교 3-4학년 쯤 되어보였고 단발머리에 나들이 복장을 하고 있었다. 감기 기운이 있는채로 학교 야외 활동을 했는데 열이 나고 구토를 해서 데려왔단다. 창백한 얼굴에 약간 졸려하는 것 빼고는 진찰과 초기 응급 검사 결과 아이에게 큰 이상 소견은 없었다. 탈수가 심한 상태여서 해열제와 수액을 처방하고 입원을 시켰다.

오후 늦게 병실을 찾았을 때 아이의 상태엔 변화가 없었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병동 스테이션에 돌아와 입원 시 시행한 검사 결과를 확인했을 때였다. 신장 기능을 나타내는 수치가 정상을 크게 벗어나있었다. 윗년차 전공의에게 전화로 상태를 보고하고 걱정되는 마음에 병실로 돌아가는데, 병실에서 아이의 부모가 뛰쳐나왔다. 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아이가 혈변을 본 것이었다. 침대 시트가 선홍색으로 물들어있었다.

*

"엑스레이 찍었는데 장중첩증 같대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아내의 떨리는 목소리엔 불안이 가득했다. 아이는 몇차례 더 보챘고, 그만큼 혈변을 더 보았다. 소아 환자를 안본지 오래 되었다지만 왜 미리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후회와 자책이 다시한번 밀려왔다. 항문을 통해 압력을 주어 장을 풀어주면 대부분 나아지지만, 막상 내 아이의 문제가 되었을 땐 그런 교과서적 지식과 통계는 의미가 없는 법이다. 도통 집중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외래 진료를 보면서도, 머리 속에선 이미 좋지 않은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다. 초기 치료가 잘 안되어 수술을 해야했던 몇몇 사례들이 떠올랐다.

십년 전 그날 병실에 있던 아이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의식은 응급실에서 확인했던 것보다 확실히 나빠져있었다. 더이상 이곳에서 관찰하는 것이 어렵다는 판단 하에 모병원으로 전원하기로 했다. 검사 결과를 확인하며 소견서를 쓰기 시작했을 때, 아이는 온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짧은 파도처럼 지나간 몇 차례의 경련 이후 찾아온 심한 발작은 항경련제를 최대 용량까지 올려 주사를 해도 멈추질 않았다. 아이의 부모는 패닉 상태였고, 시시각각 급속도로 악화되는 상태를 곁에서 지켜보는 나도 당황스러움을 넘어 공포감에 떨고 있었다. 서둘러 아이를 앰블런스에 실어보내고 나니 바깥은 이미 어둠이 걷히고 동이 튼 뒤였다.

전원 이후 아이는 곧바로 모병원의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며칠 뒤 확인된 병명은 전격성 바이러스 뇌염이었다. MRI로 본 뇌는 폭격을 맞고 난 폐허처럼 끔찍할 정도로 여기저기 얼룩이 져 있었다. 파견 병원에서 돌아와 새로운 일을 시작한 상태였지만 일이 손에 잡힐 리 없었다. 매일 아침 중환자실 환자 명단을 확인했고, 아이의 이름이 남아있으면 일단 안심을 했다. 아이는 힘겹게 버티고 있었고, 나는 처음 본 의사가 내가 아니었다면 결과가 달랐을지 모른다는 자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중환자실 주치의는 병세가 워낙 빠르게 진행되어 일찍 전원되었다 해도 결과가 크게 다르지 않았을거라 했지만 그 말이 위안이 되진 않았다. 소아중환자실은 일부러 피해다녔고 밤이면 악몽을 꾸기도 했다.

용기를 내어 아이를 보러 간 건 한달 쯤 지난 뒤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내가 방문한 그 시간은 부모의 면회시간이었고, 침대 곁에 있는 그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더이상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아빠는 마스크 위 텅빈 시선으로 아이의 손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의 어깨가 몇번쯤 들썩거렸던 것 같기도 하다. 먼 발치에서 바라보던 나는 면회 시간이 끝나기 전에 그 자리를 도망치듯 떠났다.

다시 두달간의 지방 병원 파견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중환자실 환자 명단에서 그 아이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속에 얹혀있던 무거운 돌덩어리를 내려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 아이가 집으로 돌아갔는지, 다른 병원으로 전원되었는지, 아님 그 힘겨운 싸움을 영영 그만둔 것인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남아있는 의무기록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나는 기록을 찾아보지 않았다. 그날의 공포스런 기억과 일부러 다시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고, 그 아이가 어떻게 병원을 나갔는지 알게되는 걸 피하고 싶었다.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눈코뜰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새로운 환자들이 입원하고 퇴원했고, 그 아이에 대한 기억은 자연스레 조금씩 묻혀져갔다.

*

아이는 제 엄마 품에 안겨 잠들어있었다. 택시에서 내려 아내와 아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나왔다. 미안할 따름이었다. 미안한 마음은 대수롭지 않게 무시했던 내 아이와 아내를 향한 것이기도, 십년 전 그 아이와 부모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그 아이의 기억은 문득문득 신경통증을 일으키는 오래된 흉터처럼 그동안에도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그 부모의 마음은 이제서야 조금 더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환자들에 대한 기억 중엔 흐뭇하고 뿌듯한 것도 많지만 아프고 안타까운 순간들도 있다. 어느 의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뿌듯한 것이든 안타까운 것이든, 의사로서의 삶을 지속해가는데 도움이 되는 기억들이다. 그 아이와의 만남 이후에도 또다른 아프고 안타까운 순간들이 있었다.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은 가슴에 생채기를 남기고, 시간이 지나면서 꾸덕꾸덕 굳어진 상처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다시 아련한 통증을 일으키곤 한다. 한동안 잊고있던 십년 전 기억이 헤집혀져 뿌옇게 떠올랐다가 가라앉던 오늘처럼.

십년 전 그 봄날의 오후와 같이 환자와 가족들, 그리고 그들을 만나야 할 의사들로 북적이는 응급실에서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