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2일 수요일

의사가 되길 원하는 학생들에게

의대 진학이 목표라는 네 명의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이 멀리 대구에서부터 찾아왔다. 앳된 얼굴이지만 뽀얀 피부에 가벼운 화장을 하고 비슷한 색깔의 틴트를 바른 입술이 요즘 학생들다웠다.

내가 할 일은 학생들의 질문에 답을 해주는 것 뿐이었다. 아이들이 준비한 질문은 다양했다. 전공을 선택할 때 뭘 기준으로 해야 하는지, 의대 졸업 후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뭐가 있는지와 같은 기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우리나라 의료제도의 문제점이나 의사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한계 등 쉽게 답하기 어려운 것들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한 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아직 어린 학생들에게 눈높이에 맞지 않는, 너무 주관적이고 지엽적인 내용만 꼰대처럼 장황하게 늘어놓은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의사가 되길 준비하면서 읽었으면 싶은 책 리스트를 뒤늦게 문자로 보내주었다. 아이들은 오늘 처음 만난 의사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이내 잊을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 문답은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 대학 생활을 하면서, 수련을 받으면서 꼭 해야할 활동이 있나요?

- 구체적인 활동을 추천하긴 어렵지만 의사가 될 분들이 잊지 않았으면 하는 게 있어요. 학교와 병원에서 배우고 공부할 것들이 많아 힘들거에요. 그래도 학교와 병원 밖에서 생기는 일들에 대해서 관심을 잃지 않았으면 해요. 의사가 된 다음, 이런저런 문제들에 대해 좌절도 하고 때로는 분노를 느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병원과 의료계 바깥으로 눈을 돌리면 더 많은 부조리와 문제들이 있고, 내 문제만큼이나 타인의 문제도 중요하다는 걸 잊으면 안됩니다. 적절한 균형 감각이 필요해요. 
지금 의사를 둘러싼 여러 문제는 저를 포함한 의사들이 나와 타인의 문제 인식에 있어 균형 감각을 잊은 채 살아온 것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아요. 내 문제야 나만큼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이 없지만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문제는 그렇지 않을테니, 계속 노력하지 않으면 금새 균형이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다양한 책을 읽어도 좋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도 좋아요. 어떤 방식이든 외부에 대한 관심의 끈, 그걸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2018년 12월 7일 금요일

진주장 이야기

"번데기탕도 파는데, 사갈까요?"

퇴근길이었다. 며칠새 부쩍 쌀쌀해진 날씨에 잰걸음을 더 재촉하던 참이었다. 전화기 너머 아내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고춧가루를 푼 뜨끈한 번데기탕 맛이 떠올라 입안에 침이 고였다.

길 건너 아파트 단지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수요일마다 장이 선다. 아파트 이름을 앞에 붙여 **장이라 불리지만 파는 것은 먹거리들 뿐이다. 그래도 종류는 꽤나 다양하다. 아파트 단지 특성상 닭강정, 돈가스, 꽈배기, 만두 같은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간식들이 많다. 잔치국수와 육개장은 저녁 식사 대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족발, 순대, 곱창볶음과 같은 음식은 소주 한잔 곁들여 먹기에 좋다.

일주일 내내 오늘 저녁엔 뭘 해먹을까 고민하는 이들에게 동네에서 열리는 장은 하루 저녁이나마 고민을 덜어주는 고마운 존재다. 우리 집도 수요일 저녁은 장에서 사온 음식들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은 닭강정과 잔치국수를 즐겨 먹는다. 지난 수요일 저녁에도 아내가 장에 간다기에 내 몫으로는 순대를 주문해놓은 터였는데, 옆집에서 번데기탕을 판다는 것이었다.

아파트 단지 앞 편의점에서 소주 한 병을 사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애들은 제 몫의 국수와 닭강정을 해치운 뒤였다. 작은 냄비 안에서 번데기탕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소주잔을 챙겨 식탁에 앉았다. 순대 한 접시와 번데기탕이 든 냄비를 함께 놓으니 넉넉한 한 상이 된다.

"닭강정집 쿠폰을 열 장 다 모았네."

싱크대 앞에 서있던 아내가 혼잣말처럼 이야기했다. 말투에 힘이 없다. 아내는 연말에 직장 일이 많아지면서 표정이 어두워졌다. 원체 부지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기보단 자신이 나서는 성격이라 일이 많은 편이다. 스스로도 일은 타고난 것 같다고, 전생에 무수리였나 보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면서도 늘 씩씩하게 헤쳐가는 그녀이다. 그럼에도 요즘은 지나치게 버거운 상황에 힘겨운 것 같아 걱정이다. 오늘도 어깨가 축 처져보인다.
아내가 고개를 돌려 웃으며 덧붙였다.

"열 장 모으면 닭강정 1인분이 공짜거든요.”

멀뚱한 표정인 나를 보며 아내는 말을 이었다. 

“근데 추운 날씨에 너무 고생하면서 팔고 있어가지구, 미안해서 쿠폰을 못쓰겠어요.”

일전에 아이들 손을 잡고 닭강정을 사러 갔을 때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채 활기찬 표정으로 응대하던 젊은 사장님이 생각나 난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겨우 만원어치 쿠폰 열 장에 대한 짧은 이야기였다.

아내의 이야기는 이내 오후에 들었던 둘째 어린이집 소식을 거쳐 요즘 날씨에 대한 것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내일 날씨는 조금 더 포근해질 거라 했다. 거실 형광등 빛 아래 아내의 어깨가 조금은 더 단단해져 보였다.

2018년 11월 17일 토요일

문제는 호르몬

감성이 중요한 시대라지만 우는 남자가 환영받기란 어렵다. 박보검이나 송중기가 아닌 평범한 중년의 아재가 아무데서나 눈물을 보였다간 주접을 떤다거나 찌질하다는 핀잔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말하자면, 본래 눈물이 많은 편이었다. 책이나 드라마를 보며, 음악을 들으며 훌쩍거리는 일은 다반사였다.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면 그다지 슬픈 장면이 아님에도 흘러나오는 눈물에 주변의 눈치를 보며 민망함을 느낀 적도 많았다.

근래에 뜬금없이 눈물이 나 당황스러울 때가 많아진 건 호르몬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나이가 들면 남성호르몬은 줄고 여성호르몬이 늘어난다고 하니까. 지난 겨울, 아이들과 소파에 앉아 스노우보드 경기를 보는 중이었다. 하프파이프 끝에서 로켓처럼 튀어올라 몸을 몇 차례 비튼 뒤 곡예사처럼 우아하게 착지를 해대는 경이로운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 찬란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 선수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 순간 엉뚱하게도 코끝이 찡해져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피했던 기억이 난다.

더 당황스러운 순간은 아이들을 나무랄 때이다. 아이들 앞에서 심각한 얼굴로 호통을 치는 찰나에 매번 눈물이 핑 돌아버리는데, 이럴 때면 아이들에게 들킬까 상황을 아내에게 맡기고 잠시 자리를 피했다 돌아와야 한다. 아이들에 대한 화는 잠깐이다. 처음의 기세등등하던 태도는 금새 사라지고, 감정을 이기지 못한데 대한 자괴감과 실망감이 해일처럼 밀려오곤 한다. 몇마디 훈계를 더해보긴 하지만 매번 경기는 결국 내 패배로 끝난다. 큰애는 예전과 달리 이제 아빠가 야단을 쳐도 여간해선 울지 않는데, 이쯤이면 그냥 패배가 아니라 콜드게임 패 정도인 셈이다.

4학년 아이들의 학예회 날이었다. 아이들은 머리만큼이나 큰 리본을 가슴에 달고 탬버린 춤을 추고, 양손에 든 깃발을 음악에 맞춰 돌려대고, 다양한 악기를 들고 합주를 하고, 수화를 응용한 율동을 하고, 스케치북을 한장한장 넘겨가며 카드섹션 무대를 만들었다. 아이들의 몸짓은 서툴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사실 무엇을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제작년보다 한뼘씩은 더 큰 아이들의 모습 자체만으로도 놀랍고 신비로웠다. 아이들 모두가 '자기 자신'에 성큼 더 가까워진 것처럼 보였다. 음악은 경쾌하고 아이들의 표정은 발랄했지만 이상하게 난 또 코끝이 시큰거렸다.

역시 호르몬이 문제인가 보다.


2018년 4월 6일 금요일

의뢰회신서

장인께서 다음 주에 수술을 받으실 예정이다. 언젠가부터 한쪽 눈이 어른어른하다시더니, 근처 안과 진료 결과 망막에 주름이 잡혔다고 한다. 모병원에서 다시 진료를 보고 수술 날짜를 받은게 두어달 전이다. 

입원 날짜, 수술 날짜가 정해졌고 지난 주엔 입원 전 검사를 위해 병원에 다녀가셨다. 검사 잘 하고 돌아가셨느냐고 통화를 하는데, 입원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신 모양이다. 수술 이틀 전에 입원을 하고, 수술 이후에도 며칠은 병원에 계셔야할 것 같은데 입원 기간에 대한 설명을 못들으신 모양이다. 
예기치 않게 일상을 비워야하는 환자 입장에선 얼마동안의 공백을 준비해야할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이런 기본적인 내용에 대해 설명이 없었던걸까, 아님 검사실과 진료실을 정신없이 왔다갔다 하는 와중에 당신이 들었던 것을 잊으신걸까. 

외래에 전화해 입원 기간을 물어볼까 싶었지만 내가 직원임에도 막상 환자 보호자 입장이 되니 선뜻 문의하기가 망설여진다. 결국 '망막 수술 입원 기간' 등을 구글링하고 있노라니 늘상 느끼는 거지만 이 병원도 아직 갈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출근하니 책상 위에 봉투가 놓여있다. 안에 든 건 지난달에 외부 병원으로 의뢰한 환자의 회신서였다. 

이곳에서 모병원이 아닌 다른 병원으로 의뢰하는 것은 대개 환자의 요청이 있는 경우에만 이루어지는 흔치 않은 일이다. 이렇게 회신서를 받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다. 회신서야 해당 병원의 행정 시스템에 따라 보내졌을 것이다. 흔한 시술이고 회신 내용도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보냈던 환자에 대한 치료가 별탈 없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하게 되니 마음이 가벼워지고 치료를 담당한 선생님께 조금은 고맙기도 했다.


회신서를 보내는 것은 의뢰를 한 의료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일 수 있다. 물론 현실적으론 환자를 보내준 것에 대한 감사와 이후에도 환자를 보내달라는 뜻이 깔려있을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간에 회신서를 챙겨보내는 것은 제대로 된 의료전달체계를 만드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예전 모 대학병원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일일이 회신서를 작성해 보내셨다는 일화도 있지만, 대개 행정적인 지원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행정적인 지원을 충분히 할 수 있음에도 신경쓰지 않는 병원들도 있다. 그런 곳은 굳이 이런 애프터서비스를 하지 않아도 환자로 넘쳐나서일텐데, 또 환자가 많은 병원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무수히 많은 환자 의뢰서를 받고있는, 내가 속한 이 병원은 답장을 몇 통이나 보내고 있을까를 생각해보니 늘상 느끼는 거지만 역시나 아직 갈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2017. 4. 6)


2018년 2월 22일 목요일

다이하드

특별한 일이 없는 주말 저녁이면 아이들과 영화를 본다. 웬만한 초딩용 애니는 두루 섭렵한고로 그렇잖아도 최근엔 애니 외의 장르를 곁눈질한 터였다.(무엇보다 디즈니건 드림웍스건 픽사건 이제 엄마 아빠가 더이상 애니는 못보겠어!) 더빙판을 구할 수 없어 자막으로 보았던 '프리윌리'의 경우 기대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재미있게 본 눈치였다. 그에 반해 '인디아나존스’에 대한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아이와 함께 볼 영화로 '(키아누리브스와 산드라블럭의) 스피드'를 골랐는데 아이가 손에 땀을 쥐어가며 너무나 재미있게 보았다는 모 페친의 글을 보고, 우리 집에서도 며칠 뒤 같은 영화를 상영하기로 했다. (두 초딩은 같은 나이다.) 만화가 아니란 소식에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던 우리 집 초딩 역시 영화의 줄거리를 대강 이야기해줬더니 나름 관심을 보인다.
20년이 넘은 영화는 세월만큼이나 때깔이 구리고 대사는 유치하며 편집은 툭툭 끊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째 녀석은 흥미진진한 표정이었다. 가끔은 영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뒤늦게 엉뚱한 소리를 하긴 하지만. 여섯 살 둘째는...... 뭐 그냥 패스하자. 아이들과 함께 볼 명목으로 골랐건만 막상 가장 신이 난 관객은 대학 초년생 시절 이 영화를 보고 키아누리브스의 팬이 되었던 아내였다.
영화에 대한 관객의 평점이 나쁘지 않음을 확인하고 자신감을 얻은 아빠와 엄마는 올디스벗구디스를 외치며 당분간 추억의 걸작 시리즈를 상영하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영화가 '다이하드'.
다이하드가 어떤 영화인가. 80년대 최고의 액숀 영화이고 브루스윌리스를 일약 최고의 액숀 배우로 만들어 주었으며, 한국에선 서울올림픽 기간에 개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흥행 대박을 일으킨 영화 아니겠는가. 개인적으론 단체 관람 후 엔딩크레딧을 보며 벌렁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던, 십대 시절 최고의 영화 중 하나였던 것이다.
생김새가 다른 서양 배우들의 얼굴을 구별하기 어려워하는 아이가 가끔 우리 편과 나쁜 놈들을 헷갈리긴 했지만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그럼에도 껄쩍지근한 뒷맛이 남은 건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의 열광적인 반응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는데, 내친김에 이번 주말엔 다이하드 2를 보기로 했다. 참고로 난 존 맥티어넌의 1편보단 레니 할린의 2편을 더 좋아한다.


개고생을 하는 와중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 맥클레인 형사 캐릭터는 액션과 함께 영화를 이끄는 두 축이다. 하지만 그가 던지는 (지금은 촌시러우나 당시엔 그렇지 않았을) 유들유들한 멘트들을 열 살 관객이 이해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계속되는 총격전과 폭파씬이 좀 지루해졌는지 약간 삐딱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는데, 예를 들면.
악당들의 수상한 움직임을 눈치채고 조용히 추적하는 맥클레인
- 쟤네가 다 나쁜 놈들 아냐? 근데 왜 그냥 보내?
좁은 송풍기 통로로 들어가기 전 윗옷을 벗어던지는 맥클레인
- 옷은 왜 벗는 거야?
맥클레인의 총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악당들
- 저기 나오는 나쁜 놈들은 다 바보인 것 같아.
자동 소총 탄피가 우박처럼 쏟아지는 총격전 중에
- 영화에서 나오는 건 다 가짜 총 아냐?
"야, 그렇게 생각하면 아예 영화를 보지 말아야지. 또 만화는 뭐 하러 보냐? 다 그림인데."
향수에 젖은 40대 관객들의 흥을 딱딱 끊어주는 말에 짜증이 나서 한마디 던지니 입을 다물고 샐쭉해진 녀석. 악당의 비행기가 폭파되고 엔딩크레딧과 함께 '렛 잇 스노우'가 울려퍼지는데 마지막 멘트를 날리고 휙 나간다.
"정말 다이 하드(Die Hard)네."
브루스 형님. 욕 보셨어요.

2018년 2월 20일 화요일

가족이 해야할 일

- 네 아버지가 말이다.

아이들이 잠들자 어머니께서 방바닥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보통은 아이들을 재우러 들어가기 전에 안녕히 주무시란 인사를 드리고 안방 중문을 닫고 나오는데, 하고싶었던 말씀이 있었나보다. 어머니의 말씀은 평소보다 더 길게 이어졌지만 내용은 그간 종종 들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환갑을 넘으시면서 어머니는 가끔 아버지 흉을 보셨다. 그렇다고 친구나 이웃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성격은 아니신지라 아버지에 대한 넋두리를 듣는건 자연스레 누님과 나의 몫이 되었다. 겨우 두세달에 한번씩 본가에 갔었던 나에 비해 가까운 곳에 사는 누님은 훨씬 자주 어머니의 하소연을 들었을 것이다. 지난 일년간 누님이 조카의 입시 준비 때문에 왕래가 줄어들자 그동안 쌓인 게 많으셨던 모양이다. 어머니의 말씀이 이어지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은 추임새를 넣었을 뿐이다. 설 전날 밤늦게 시작된 모자간의 대화는 내가 또 아들에게 괜히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았구나 하는 어머니의 자조 섞인 후회로 끝이 났다.

설날엔 처가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평소와 같이 반주를 얼큰하게 하신 장인께선 일찍 잠이 드셨다. 건넌방에서 아이들을 재우고 책상에 앉았는데 거실에서 장모님과 아내가 나누는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린다.

- 네 아빠가 말이다.

장녀인 아내는 장모님을 닮은 걸로는 외모와 성격 모두 딸 셋 중 제일이다. 그래서인지 장모님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내이다. 아내는 꼼꼼하고 모든 일들을 미리 준비해두지 않으면 걱정이 많아지는 성격인데, 장모님도 마찬가지이다. 반면 장인께선 다소 즉흥적이고 급한 성격이시라 종종 말다툼이 생기곤 한다. 최근엔 처제의 결혼을 앞두고 신경을 쓰시면서 두 분 사이에 충돌이 늘어난 것 같았다.

방에 들어온 아내가 난처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님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하고싶은 말씀이 많으셨나 봐. 따로 이야기하실 곳도 없을텐데 이럴 때라도 잘 들어드려야죠.”

연휴 마지막 날 기차를 타고 올라오는 길에 아내와 다음 주에 있을 처제 결혼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맞은편에 앉아있던 아들 녀석이 짜증 섞인 말투로 이야기한다.

- 내 이야기 좀 들어보라니깐.

제딴에는 나름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엄마 아빠가 귀기울여 듣지 않고 다른 대화만 하고 있으니 골이 났나보다. 열한살이 되었지만 아직까진 조잘조잘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다. 내용이라 해봐야 친구랑 했던 놀이, 최근에 봤던 만화책이나 티비에서 보았던 만화 영화 이야기 정도가 다이지만. 요즘엔 하는 이야기의 절반 정도는 포켓몬고 게임에 대한 것이다. 주말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포켓몬들의 소식을 반복해 듣고 있노라면 짜증이 날 때도 있다. 그래도 아직까지 엄마 아빠에게 자주 말을 건네주는 걸 고마워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남자 아이는 사춘기가 되면 말수가 확 줄어든다는데 언젠가 그 시기가 오면 어떻게 아이를 대해야할까 미리 걱정을 하기도 한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어렸을 적엔 나도 어머니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많이 했을 것이다. 기껏해야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친구랑 했던 놀이, 문구점에 들러 했던 뽑기 이야기나 텔레비젼 만화 이야기 정도가 대부분이었을 테지만. 어머니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이젠 짐작이 간다. 그땐 주로 내가 말을 하고 어머니가 그걸 들어주셨겠지만 내가 중년이 된 지금은 어머니가 말을 하고 나는 듣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방통행에 가까운 대화이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때로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가족간에 가장 중요한 할 일이란 생각이 든다.

개학날

방학이 끝나고 개학날이었다.

방학 내내 늦잠을 자는데 익숙해졌던 아들은 한 시간 먼저 일어나 잠이 덜깬 얼굴로 식탁에 앉았다. 밥알을 한알한알 세듯 입을 오물거리던 아이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아빠. 근데 왜 오늘은 늦게 출근해?"
"오늘은 아침에 진료가 없어. 개학날이기도 해서, 너랑 같이 나가려구."
"그렇구나."

심드렁하게 대답한 아이는 숟가락으로 밥공기를 뒤적거렸다.

남자 아이의 등교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이를 닦고, 까치집이 생긴 머리칼에 물을 묻혀 가라앉히고, 허물을 벗었다가 새 껍질을 쓰듯 옷 속으로 몸을 집어넣고, 두터운 자켓을 입고, 가방을 메고 현관에 서기까진 십분 정도면 충분했다.

영하 십도를 훌쩍 넘는 아침 날씨였다. 며칠째 한파였으므로 단단히 채비를 하고 나왔지만 코끝이 시렸다.

"아빠가 하나 들어줄게."

개학날이라 들고갈 준비물과 과제가 많았다. 양손에 든 가방 중 하나를 선뜻 건네지 않고 망설이던 아이는 머뭇거리며 로봇영재 수업 가방을 내밀었다.

학교까진 오 분이 채 안되는 거리이다. 어제까지와 달리 아파트단지 내 인도는 학교를 향해 종종걸음을 치는 아이들로 북적였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약간의 흥분과 소란스러움이 섞인 공기가 볼을 간질였다. 딱 하루 차이인데 아침 풍경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새로 출현한 포켓몬에 대해 이야기하던 아이는 학교가 가까워지면서 불편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빠, 이제 그 가방 나한테 줘."
"왜, 얼마 안남았잖아. 그냥 아빠가 들어주고 싶어서 그래."
"아이참. 내가 들 수 있어. 그냥 줘."

녀석은 아빠와 나란히 등교를 하는게 부끄러운 눈치였다. 약간의 실랑이 끝에 결국 녀석이 이겼다. 가방을 건네받아 양손에 짐을 든 아이가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아빠, 나 간다."

녀석은 재빠르게 횡단보도를 건너 재잘대는 아이들 틈에 끼어 학교 후문 안으로 사라졌다. 한번쯤 뒤돌아 손을 흔들어주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이는 그사이 아빠가 뒤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만 것 같았다.

2017년 9월 1일 금요일

가정의학교실 20주년을 축하하면서

전공의 근무를 시작한 게 2003년이니 14년이 지났습니다. 의대를 다니면서 나를 찾아오는 환자들을 이웃처럼 돌보는 동네 의원의 원장이 되겠다는 바램을 가졌었고, 가정의학과를 선택한 것도 개원의가 되기에 가장 적당한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대했던 대로 가정의학과는 개원의가 되기 위한 경험을 쌓고 마음가짐을 준비하기에 딱 맞는 곳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내 환자가 호소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의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어찌 보면 오만한 자신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때는 분만이나 수술까지도 척척 해냈다는 선배들의 무용담스러운 일화를 들으면서 좀더 일찍 의사 생활을 하지 못했던 걸 아쉬워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동네 의원이 아닌 대학병원에서 근무하고 있기도 하지만, 설사 오래 전 바램처럼 동네 의원을 차린다 해도 내가 그런 의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제3세계 오지 마을이라면 모를까,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한 명의 의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해결하려 해서도 안 됩니다. 의학의 발전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한 명의 의사가 의학 전반에 걸쳐 발전하는 학문과 기술의 속도를 따라잡고 소화해 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환자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둘째치고 내 전공에 해당하는 문제만 해결하기에도 버거운 것이 사실입니다. 모든 문제를 직접 책임지기 어려운 것도 이유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특정 과의 전문의를 쉽게 만날 수 있는 지금과 같은 현실에선 내 전공에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라면 깊이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문제를 담당하는 다른 전문의에게 맡기면 그만입니다.
의료는 점점 전문화, 세분화 되어갑니다. 이러한 흐름이 의학의 발전에 일조했음은 사실이지만 전문화, 세분화된 의료는 파편화, 개별화로 인한 부작용을 동반합니다. 부작용은 온전히 환자들의 몫입니다. 내과에도 순환기, 호흡기, 소화기 등 여러 개의 분과가 있고 소화기내과에도 위장, 간, 췌장을 보는 의사가 따로따로 존재하는 종합병원에서 웬만한 경험이 없는 환자라면 길을 잃고 헤메기 십상입니다. 종합병원의 의사가 이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대개는 해당 과의 질병이 아니란 뜻이며, 당신의 건강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장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환자는 어렵게 찾아간 진료실을 나와 막막한 심정으로 다시 다른 과 의사를 찾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내 건강 문제를 잘 알고 있는 단골 의사가 있어 그와 상의한다면 애초에 병원을 찾아 맴도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전문화, 세분화 되어가는 의료 환경에서 환자의 다양한 증상을 전체적으로 평가하고 적절한 지침을 줄 수 있는 의사가 더욱 필요한 이유입니다.
동네 의사로 환자를 보며 의원을 꾸려가는 것이 점점 더 어렵다고 합니다. 유명무실한 의료 전달 체계 아래 대형 종합 병원으로의 환자 쏠림은 심해져 갑니다. 일차 의료를 담당하는 의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여전히 가정의학과 수련의 목표이지만, 가정의학을 전공하는 후배들은 이전만큼 동네 의사를 꿈꾸지 않습니다. 일차 의료가 위기에 빠진 것이 모두 가정의학과의 책임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차 의료를 떼어놓고 가정의학과의 역할과 미래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우리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함은 자명합니다. 이를 위해선 미래에 대한 통찰과 체계적인 전략이 필요할 것입니다. 일찍부터 이러한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노력해오신 선후배들께는 어줍잖은 제언이 된 것 같아 민망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일차 의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을 이끌어 갈 역량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십여 년 전의 바램처럼 언젠가 동네 의원의 진료실에서 환자를 만나는 상상을 하며, 환자의 단골 주치의 역할을 하는 선생님들이 좀더 뿌듯함을 느끼는 환경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7.8.

포켓몬 인형 뽑기

툭, 하고 인형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집게에 위태위태하게 매달려있던 파이리 인형이 구멍 속으로 떨어진 뒤였다. 떨어졌다기 보다는 빨려들어간 것 같았다. 기대를 하지 않았던 아이는 눈이 동그래져 나를 쳐다보았다. 파이리 인형을 손에 든 아이는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었지만, 나는 순간 뒷골이 싸늘해짐을 느꼈다. 아니나다를까, 엄마와 함께 이상해씨가 가득 들어있는 기계 앞에 딱 달라붙어 있던 둘째가 오빠의 손에 들려있는 파이리 인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뿔싸. 
몇 달 전 일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쳤다.

육 개월 전, 아이들과 지방에서 올라오는 길에 들렀던 아울렛 매장에서의 일이었다. 식당 입구에 포켓몬 인형 뽑기 기계가 두 대 있었다. 한 번 뽑아볼까?
아내가 매장을 둘러보러 간 사이 무료함을 달래보고자 아이들에게 제안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만원에 열 두판. 이브이 인형을 목표로 삼았지만 무심한 집게는 인형 얼굴을 긁기만 하거나 어렵게 잡아올렸다가도 힘없이 떨어뜨리길 반복할 뿐이었다. 오 분도 안되는 시간에 만원을 날린 뒤 깨끗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첫째는 아쉬운 얼굴로 돌아섰지만 문제는 뽑기 기계 앞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딸이었다. 딸아이는 이브이 인형과 아빠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이 기계에서는 돈을 더 써도 뽑을 수가 없고, 기계 안의 인형은 따로 살 수도 없다고 되풀이해 설명해도 막무가내였다. 인터넷으로 사주겠다고, 바로 주문해 주겠다고 해도 통하지 않았다.
- 이브이~ 이브이~
- 인터넷으로 산 거는 지금 안오잖아~ 엉엉
인형 이름을 목놓아 부르며 땅바닥에 철퍽 주저앉아 우는 아이를 달래다 결국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나도 함께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이 곁눈질을 하며 수군거렸다. 결국 쇼핑은 시작도 못하고 그냥 서울로 돌아왔고, 그 뒤로도 주문했던 이브이 인형이 도착할 때까지 이틀을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오늘 신천역 인형 뽑기 방에서도 그때와 같은 일이 반복되진 않을까. 나는 빠르게 딸아이의 눈치를 살폈고, 오빠를 원망스럽게 보는 딸아이의 눈망울 속에서 짧은 순간 동공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다. 일단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상해씨가 든 기계로 다가가 지폐를 넣고 스틱을 움직였다. 몇 차례 시도했지만 아까와 같은 행운은 따르지 않았고, 기계 안을 살펴보니 한 마리의 인형 탈출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최대한 태연하고 쿨하게 행동해야 했다.

- 이상해씨는 오늘 안되겠다.

뒤돌아선 아빠의 말에 딸아이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잔뜩 긴장을 했지만 이번엔 소리를 지르거나 떼를 쓰진 않았고 이상해씨를 목놓아 부르지도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서럽게 울 뿐이었다. 겨우 육 개월만에 생긴 엄.청.난. 변화였다. 나는 아내와 눈짓을 교환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파이리 인형을 안고 촐싹대는 첫째에게 눈을 부라리며 딸아이를 안고 토닥이자 아이는 어깨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며 눈물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 아빠, 이상해씨는 언제 와?




2017년 3월 22일 수요일

심장 질환이 없는 분들은 오메가-3 드시지 마세요.

미국심장학회에서 최근 오메가-3 보충제의 심혈관질환 예방 효과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2002년 이후 15년만에 업데이트 된 관련 보고이며, 이후 발표된 무작위대조임상연구 결과를 근거로 합니다. 
아래는 관련 기사 링크입니다.AHA, "오메가3 심혈관질환 일차예방 효과 없다"일반인에서 심혈관질환 예방 효과 있다는 근거 부족…이차예방에서는 효과 있어
http://www.mo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867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상을 다음과 같이 나누었을 때
1) 건강한 일반인의 경우 
2) 당뇨병 환자나 심혈관질환 위험 요인을 많이 가진 환자 
3) 관상동맥질환이 이미 있는 환자
4) 심부전 환자
1, 2번은 심장 질환이 없는 사람이므로 일차 예방에 속하며, 3, 4번은 질환이 이미 있는 환자이므로 이차 예방에 속합니다. 
결론은, 일차 예방(1, 2번)의 경우 효과가 없고 이차 예방(3, 4번)의 경우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핵심적인 변화는 2)번에 있습니다. 
당뇨병 환자나 심혈관질환 위험이 높은 환자들의 경우, 오메가-3 복용으로 예방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과거 지침에는 그러한 뉘앙스의 언급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오메가-3 보충제 시장이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커지는데 일조를 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여러 연구들에서 이러한 환자들의 경우에서도 심혈관질환 예방 효과가 없다고 보고되었고, 이번 보고서에 반영된 것입니다. 


그러니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환자분들 오메가-3 사드시지 마세요. 이미 심근경색을 앓으신 분들은 재발 방지에 도움이 될 여지가 있으니 의사와 상의해 결정하시면 됩니다.


추가로, 오메가-3가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춘다고 잘못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효과 없으니 역시 사드시지 마세요. 콜레스테롤이 아닌 중성지방 수치를 낮추는데는 효과가 있으니 중성지방이 많이 높은 분들도 의사와 상의해 결정하시면 됩니다. 


아래는 미국심장학회 보고서의 권고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