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24일 화요일

유혹하는 글쓰기







그는 단문을 즐겨쓴다. 짧게 끊어치는 듯한 문장은 그의 소설의 특징인 빠른 속도감을 유지하는데 주된 역할을 한다. 반면에 어떤 부분에서의 묘사는 구체적이고 세밀하다. 작가가 만든 리듬에 따라 독자를 쥐락펴락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 그 와중에서도 군데군데 유머를 섞어 심각한 상황에서도 읽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위는 이전에 내가 알고있던 그가 쓴 글의 특징이다. 스티븐 킹은 50여 편의 장편과 200여 편의 단편을 발표했지만 그의 명성에 비해 그의 작품 중에서 막상 읽은 책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사실 책보다 영화를 통해 접한 작품이 더 많다-. 그럼에도 그의 문체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작가의 개성이 그만큼 강해서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그 특징은 작가가 의도한 것이며 그 의도가 독자에게 매우 효과적으로 전달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책은 절반이 자서전이고 나머지 절반은 작문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을 느낄만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설사 글쓰기에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다 해도 따분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가 현존하는 지구 최고의 썰쟁이 중 하나 아닌가.

예컨대 그는 작가가 되기 위한 조건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작가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두 가지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슬쩍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름길도 없다.'

이 직설적인 발언에 대해 딴지를 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외에도 쉬운 단어를 쓰라거나-여기서 그의 태도는 어줍잖은 내공으로 어렵고 화려한 단어를 남발하는 행위를 조롱하는 것에 가깝다-, 수동태를 쓰지 말라, 부사를 남발하지 말라 등의 지침은 익숙한 내용이다. 문장이 아닌 문단이 글쓰기의 기본 단위라거나 '수정본 = 초고 - 10%'의 공식 역시 새겨두어야 할 조언이다. 이외에도 킹이 알려주는 괜찮은 작가가 되기 위한 팁은 다양한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소설의 요소에 대한 언급이었다.

'소설은 장편이든 단편이든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A지점에서 B지점을 거쳐 마침내 Z지점까지 이야기를 이어가는 서술, 독자에게 생생한 현실감을 주는 묘사, 그리고 등장 인물들의 말을 통하여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대화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플롯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이 나올 법하다. 대답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아니 이보시요 작가양반. 플롯이 없다니. 일찌기 교과서에서 소설의 3요소는 주제, 구성, 문체이고 구성의 3요소는 인물, 사건, 배경이라 배웠다. 반면 그가 말하는 3요소는 서술, 묘사, 대화라 할 수 있겠다. 사실적인 묘사와 대화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글을 읽고 쓸 때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주제나 구성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패기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이들을 첫 번째로 꼽기는 어려울 것이다.

'플롯보다 직관에 의존하며, 소설이란 땅 속의 화석처럼 발굴되는 것이다. (중략) 상황이 제일 먼저 나온다. 등장 인물은 그 다음이다. 마음 속에서 그런 것들이 정해지면 비로소 서술하기 시작한다. 종종 결말이 어렴풋이 보일 때도 있지만 등장 인물들에게 내 방식대로 움직이라고 요구한 적은 없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이 '자기 방식대로' 움직이기를 바란다.'

여기까지 읽으면 앞의 세 가지 요소 이전에 상황과 인물이란 요소를 더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그는 우선 갈등이 생길만한 어떤 상황을 만들고 그 안에 몇몇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자연스럽게 스토리가 진행되는데, 전후에 벌어지는 일들을 서술하고 묘사하며 인물들 사이의 대화를 기록한 것이 곧 그의 소설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글을 읽다가 마치 자신을 관찰자와 같이 이야기하는 이 부분에서 허탈해지고 말았다.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만 올렸을 뿐이라는 수상 소감을 듣는 것 같기도 하다. 워드프로세서가 인공지능을 장착한 것도 아닐텐데 등장인물들이 알아서 움직이다니. 정신만 차리고 써 나아가면 우주의 기운이 도와준다는 건가. 직관과 본능이 이끄는대로 키보드를 두드리라는 뜻이고 그 결과가 그의 수많은 작품들이라면 역시 그는 천재이고 평범한 작가 지망생들이 따라할 수 없는 초식을 구사하는 셈이다.

이 책을 읽는 대부분에게는 킹과 같이 매일 2천 단어 이상씩의 분량을 쓰는 것은 고사하고 꾸준히 글을 쓴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 닥치고 글을 써보라는 유혹의 기술이 워낙 훌륭해서, 이 책을 읽으면 괜찮은 글을 쓰고싶고 제법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물론 그 글을 다시 읽고 이불킥을 하고픈 충동을 얼마나 오랫동안 참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참고로 그가 처음으로 출판을 위한 소설을 썼던 것은 13세 때였고 <캐리>가 출판된 것은 1974년으로 그의 나이 27세 때였으며 이 작품의 보급판 판권은 40만달러였다.

2017년 1월 17일 화요일

어떤 단어를 처음 배운 날

아이들이 깨어있을 때 귀가하는 날은 잠들기 전에 함께 누워 책을 읽어준다. 잠자리 책 후보는 우선 그날의 내 컨디션에 따라 달라지는데, 대개 피곤함의 정도와 책의 글자 수가 반비례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몇 가지 옵션을 제시할 뿐이고 결국 최종 선택권은 아이에게 있다. 첫째가 혼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선택을 하는 것은 둘째의 몫이 되었다. 가끔 내 기대와는 달리 두꺼운 책을 읽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날이면-매우 잦은 일이다- 졸음을 참으며 책을 읽다가 읽고 있는 대목을 놓쳐서 아이들의 타박을 받기 일쑤이다. 

첫째의 경우 글밥이 적은 책부터 시작해 나이에 맞게 서서히 책의 두께를 늘렸지만, 이제 겨우 만 네 살이 된 둘째는 일찍부터 오빠가 읽는 책들을 읽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요즘엔 초등학생 대상의 만화책들을 선택하곤 한다. 오빠가 읽은 책의 내용을 다 소화해내고 말겠다는 생각 때문인지 스스로 먼저 그만두겠다는 경우는 없는데, 읽다보면 과연 내용을 얼마나 이해할지 궁금해지곤 한다. 문제는 줄곧 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을 선택하는 이 아이가 원체 오빠보다 질문이 많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질문은 때를 가리지않고 튀어나온다. 요즘 읽는 책은 모바일 게임 캐릭터인 쿠키들이 등장하는 학습 만화이다. 그 질문을 만난 것은 각종 쿠키들이 바다를 탐험하는 과정에서였다.

"근데 해구가 뭐야?"

졸음때문에 머리가 멍한 상태여서인지 해구(海溝)라는 단어의 뜻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게 바다 밑바닥의 튀어나온 곳이었던가? 아님 움푹 들어간 골짜기를 말하는 단어였던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당황스러울 때는 수없이 많은데, 질문에 대한 답이 떠오르지 않을 때도 그런 순간이다. 밤 열시가 넘었지만 졸음이라고는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눈빛으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아이의 얼굴을 보니 순간 마음이 급해졌다. 우선 튀어나온 곳일지 움푹 들어간 곳일지 선택을 해야했고, 어떤 단어를 써서 설명을 할지도 신중히 결정해야 했다. 

- 바다 밑바닥은 평평하지 않거든. 높은 산도 있고 깊은 골짜기도 있어. 거기 있는 골짜기를 말하는 거야. 
- 골짜기가 뭔데? (도대체 골짜기라는 단어의 급수는 몇급쯤 될까.)

- 바다 밑바닥에 있는 깊은 우물같은거야. 
- 응. 근데 우물은 뭐야? 

- 바다 밑바닥은 평평하지 않고 올라간 곳도 있고 들어간 곳도 있는데...
- 왜 평평하지 않은데?

섣불리 대답을 했다간 이런 사태가 생기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그러나저러나 좀더 멋지고 능숙하게 설명할 수는 없는걸까. 이럴 때면 아이들의 질문에 답하는 것에 이골이 났을 선생님들의 자문을 구하고 싶다. 그들은 뭔가 좀 다를 것 같다. 매순간 당황하지 않고 프로페셔널하게, 가장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지 않을까. 

대개 이러한 장면은 아이들에게 첫 번째 순간이고, 그 의미는 이런 것이다. 해구나 골짜기라는 단어부터 '곤죽이 되다'라거나 '쌍수를 든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 바다 밑바닥이 왜 평평하지 않은지와 바다 색깔이 왜 시시각각 바뀌는지에 대해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이야기해 주는 이가 자신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을 매일 하고있다 생각하면 일종의 성직자가 된 듯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고 그때문에 긴장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의미 가득하고 멋진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다 밑바닥에 있는 아주 깊은 구멍 같은 걸 말하는 거야."

해구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된 딸아이는 설명을 듣고 잠시 생각하는 듯 했지만 다른 질문을 하진 않았다. 아마 나름의 방식으로 머릿 속에 그림을 그리고 어느 구석에 이 괴상한 단어를 갈무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이 단어를 다시 만날 때면 이 순간의 설명이 떠오를 것이다. 그다지 멋진 설명은 아니었지만 때로는 그걸로 족하다. 오늘 이 단어의 의미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수준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신심 충만한 신부나 목사의 말씀을 주일마다 듣는 와중에서도 기껏해야 열 개인 신의 계명조차 늘상 잊어버리곤 하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