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8일 목요일

번식에 관한 단상

바다에 사는 모기인 폰토마이아의 생활 주기는 극단적이다. 유충은 수중에서 1년을 살고, 고치를 거쳐 성체 모기가 된다. 성체의 생애는 겨우 3시간이며 이 짧은 생애 동안의 유일한 임무는 짝짓기이다. 그래서 폰토마이아의 몸은 짝짓기에 필요한 것만 갖추었다. 생식기관, 다리, 날개다. 이것도 수컷의 경우이고, 암컷은 생식기관을 가득 달고 수면 위를 떠도는 벌레 모양의 자루에 불과하다.

Male Pontomyia natans (from Wikipedia)

최근 읽은 해양생물에 관한 책의 일부이다. 책을 읽으며 문득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생존과 번식은 동물의 본능이라고 한다. 자연 다큐멘터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동물의 짝짓기 장면을 보다 보면, 후손을 남기기 위한 다양하고 수고로운 노력에 감탄하곤 한다. 진화생물학의 계통수를 거꾸로 따라가 아래쪽 뿌리에 가까운 동물-말미잘이나 촌충 같은-일수록 단순한 번식 외의 존재 의미가 희미해지는데, 이를 보면 번식이란 수억 년 전 태초부터 부여된 본능임이 분명하다. 이들보다 한참 상위에 위치한 곤충쯤 되면 번식 행위에 고차원적 의미가 부여되기도 하지만-짝짓기 임무를 마친 뒤 암컷에게 잡아먹히는 수컷 사마귀나 거미의 희생적 결말이라던가-, 위의 책에서 소개한 바다모기의 예만으로도 근본적인 가르침을 주기엔 충분할 것 같다. 3시간의 짝짓기를 위해 1년 동안 바다를 떠돌아다니는 생이라니, 이쯤 되면 본래 동물의 생애는 번식을 위해 프로그래밍 되어있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 인간은 본능대로만 살지 않는다. 모두가 본능을 충실히 따르는 세상을 상상해보면 인간에게 이성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지만, 그렇다고 태초부터의 본능이 사라졌을 리는 없다. 그래서 출산율 0.7을 찍고 있는 이 나라에선 본능을 거스르게 만드는 현실과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도 드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생존과 번식 두 가지 본능을 모두 챙기는 것이 지나치게 고단한 일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바다 모기처럼 인생 모두를 바칠 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출산과 육아는 참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겨우 오십 년 넘게 살았을 뿐이지만 내 인생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없었다고 단언한다. 또한 그보다 더 특별한 일도 없었다는 것 역시. 세상엔 의미있는 일이 많을 것이나, 타인의 인생 첫날부터 시작해 가장 가까이에서 매일을 목격하고 함께 겪는 경험을 대신할 만한 일이 있을까. 사랑, 기쁨, 행복감, 충만함, 기대와 실망, 공허함, 자괴감, 불안, 분노, 괴로움. 아이들과 함께 하는 매일매일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탄 것과 같았다-두 아이가 십대가 된 지금은 불안과 짜증의 업힐을 오르는 일이 잦아졌다-. 자식을 낳아봐야 어른이 된다고 하는 어르신들의 말씀에 다 동의하진 않지만 그 경험을 거쳐온 지금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아이들을 낳고 기르면서 나를 둘러싼 세계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경이로운 순간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특히 돌이 되기 전까지는 매 순간이 그랬다. 눈맞춤만 해도, 웃기만 해도, 옹알이를 하거나 뒤집기만 해도 머릿 속에선 불꽃놀이가 벌어지고 팡팡 탄성이 터졌다.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 가족 친지 모두가 호들갑을 떨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아이들이 훌쩍 커가면서 불꽃이 터지는 빈도는 줄었지만 지금도 종종 경이로운 순간이 예고없이 찾아온다.

요즘 그런 순간은 주로 아이들이 겪는 관계에 대한 것이다. 큰애는 고등학생이다. 얼마 전 학원 수업을 마친 아이를 데려오며 같은 반 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반 아이들에게 인기가 별로 없는 그 친구는 그나마 아들과 가까운 편이란다. 문제는 아들도 막상 그 친구가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왜 그런지 들어보니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아들은 그 친구를 싫어하는 스스로의 감정이 편견 때문은 아닌지, 감정을 드러내고 친구를 멀리해도 되는 괜찮은지를 자문하고 있었다. 딴에는 친구에 대한 부정적인 속마음을 드러내는 게 쉽지 않았었나 보다. 그날 밤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고민을 털어놓은 아들은 마음이 가벼워졌다며 후련한 얼굴을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어려서 엄지손가락을 빨던 아이가 이만큼 컸다는 게 신기하고, 뇌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복잡한 세상을 살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해야 할 일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어려선 부모가 만들어놓은 울타리 안에서 가르침에 따라 평화롭게 생활했지만, 지금은 울타리를 넘나들다가 언젠가는 아예 떠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어놓은 복잡한 선으로 가득한 바깥 세상에서 그 선을 따라갈 것인지, 넘을 것인지를 지금처럼 계속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발자국이 새로운 선을 만드는 경험도 할 것이다.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든 그 과정을 목격하고 동참하는 것은 부모로서 경이로울 따름이다.

바다모기의 생애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까지 왔다. 지금이야 한밤중에 눈이 쌓인 창밖을 보며 차분히 감상에 젖어있지만, 앞에서 이야기했듯 아이들을 키우면서 이런 평화로운 순간은 오래 가지 않는다. 당장 이틀 전만 해도 기말고사를 앞두고 친구와 영화를 보러 가겠다는 아들에게 잔소리를 하다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으니. 인생을 게임에 비유하자면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메인퀘스트이고 나머지는 서브퀘스트라는 말도 있는데, 메인이든 서브든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역시나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과거의 부모님들과 지금 퀘스트 엔딩을 향해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 모든 부모들은 존경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