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엔 야구를 소재로 한 만화가 참 많았다. 이상무 화백의 만화에서 주인공 독고탁은 뱀처럼 에스자로 휘어 들어가는 드라이브 볼이란 마구를 던지는데, 그 만화를 읽던 당시에는 자고 일어나면 내일이라도 당장 이런 공을 던지는 투수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물리학적으로 말이 안되는 공이지만 그때는 드라이브 볼을 던지겠다고 독고탁과 같은 폼으로 쓰러지며 테니스공을 던지는 연습을 하곤 했다. 이제 그런 볼은 실제 경기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현재도 변화가 심한 공을 일컬어 마구(魔球)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실제 구종 중 마구에 가까운 것을 꼽는다면 단연 너클볼이 될 것이다.
야구 팬이라면 누구나 빠른 볼을 던지는 투수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다. 배트에 맞은 공이 쭉 뻗어나갈 때의 청량감, 물 흐르듯 부드럽게 이어지는 호수비가 주는 카타르시스, 역전 홈런의 짜릿함... 야구가 주는 매력은 다양하지만, 95마일(시속 152.9km)이 넘는 공을 포수 미트에 꽂아대며 타자를 윽박지르는 투수야말로 그중 제일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느리게 춤을 추는 너클볼은 애초부터 이런 호쾌한 속도의 매력을 느낄 수 없는 공이다. 이 책은 메이저리그에서 그저 그런 선수 생활을 하다 30세가 넘어 너클볼 투수로 변신을 하고, 마침내 최고의 영예인 사이영상까지 받게 된 한 투수의 이야기이다. 그의 인생은 변화무쌍한 너클볼처럼 굴곡이 심했고 옛날 야구 만화의 주인공처럼 드라마틱했다.
# 2013년 4월 2일 6.0이닝 4실점 패전: 2012년 최고의 시즌을 보내고 새로 계약한 팀에서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개막전에 등판한 그의 첫 경기 성적
R.A. 디키의 부모는 그가 어렸을 때 이혼을 했고, 양육권을 가졌던 어머니는 알콜 중독자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시작하는 가정이라면 아이의 인생은 여간해서 잘 풀리기 어려운 법이지만, 고교 시절 야구 팀의 주전이 된 이후 그의 삶은 야구 선수라는 확고한 정체성 아래 비교적 순탄했다. 야구 선수로서 그의 재능은 뛰어난 편이어서 대학 진학 이후에는 미국 대표 선수로 애틀랜타 올림픽에까지 출전하는 영예를 얻게 되며, 이후 1996년 메이저리그 텍사스 레인저스 구단에 1순위로 드래프트 된다. 하지만 신체 검사 과정에서 우측 팔꿈치 측부인대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애초의 81만 달러가 아닌 7만 5천 달러에 계약서에 사인을 한다.
# 2013년 4월 18일 6.0이닝 7탈삼진 2안타 무실점 (2승) / 5월 4일 6.0이닝 3피홈런 7실점 (5패)
마이너리그 생활을 시작하면서 고교 친구의 여동생이자 첫사랑과 결혼을 한다. 착실히 마이너리그 경력을 쌓던 중 다섯 시즌만에 메이저리그의 부름을 받지만 18일 동안 네 경기, 12이닝을 던지고 다시 마이너리그로 강등된다. 골프장의 악어가 사는 연못에 빠진 골프공을 몰래 수거해 팔고, 물리치료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야구 외 일을 병행하며 생계를 꾸리기도 한다.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며 30세가 되던 2005년까지 아홉 시즌 동안 그가 메이저리그에서 거둔 성적은 15승 17패, 평균자책점 5.48이었다. 스타 플레이어가 즐비한 그곳에서 성공적인 성적이라 말하기 어려운 수치이다.
# 2013년 5월 14일 6.0이닝 10탈삼진 3실점 (3승) / 5월 30일 6.0이닝 11안타 6실점 (7패)
그저 그런 선수로 끝날 가능성이 많았던 그의 선수 생활에서 큰 전환점이 된 순간은, 코치진의 권유에 따라 너클볼 투수로 변신을 택했을 때였다. 고된 연습 끝에 너클볼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2006년 드디어 메이저리그 선발진에 합류하지만 첫 경기에서 홈런 여섯 방을 내주며 패전 투수가 되고 곧바로 마이너리그로 돌아간다. 어린 시절 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상처를 경험한 적이 있는데, 숨겨왔던 어린 시절의 상처가 아내와의 결혼 생활에 갈등을 불러 일으키고 이로 인해 별거를 하는 등 가정과 일 모두에서 힘든 시간이 계속된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미주리 강을 수영으로 건너는 충동적인 도전을 하며 익사 직전까지 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 2013년 6월 10일 5.0이닝 10안타 7실점 (8패) / 6월 26일 9이닝 2안타 무실점 완봉 (7승)
생사를 넘나든 경험 이후 그의 투구는 어느정도 안정을 찾지만 팀에서 그의 위치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한국 프로야구 팀으로부터의 계약 제의를 고민 끝에 뿌리치고 난 이후에도 두 개의 팀을 더 거쳐 2010년에 와서야 뉴욕 메츠에 정착하지만 기쁨도 잠시, 35세 노장 투수는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에 스프링캠프에서 가장 먼저 마이너리그로 강등된다. 실망 끝에 야구 선수가 아닌 영어 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기도 하지만, 1안타 완봉승을 거둔 이후 다시 메이저리그의 부름을 받는다. 이후 두 시즌 동안 선발로서 안정적인 성적을 올리고, 마침내 2012년에는 20승 6패 평균자책점 2.73의 성적으로 내셔널리그 사이영상을 수상한다.
투수도 자신이 던진 공이 어디로 갈지 모르는 공이 너클볼이다. 그는 너클볼 투수가 되길 결심한 뒤 겪은 어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공을 천천히 던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시속 140킬로미터 중반을 넘는 공 수천 개를 평생 던져온 내가 이제 거의 시속 100킬로미터짜리 공을 던지고 있다. 마치 스포츠카를 팔고 세발자전거를 산 느낌이다." (240p)
"똑같은 동작으로 똑같은 지점에서 공을 놓아도 각각의 너클볼은 모두 다르게 날아간다... 너클볼 투수는 보이는 힘과 보이지 않는 힘이 함께 작용하여 만들어지는 너클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투수는 자신도 예측하지 못하는 공에 당황하고 만다."(257p)
완봉승을 거둔 바로 다음 게임에서 홈런을 서너개씩 맞고 패전 투수가 되는 경험을 흔히 해야하는 너클볼 투수의 숙명은 마치 굴곡진 우리네 인생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너클볼 투수끼리의 유대감은 팀 동료 이상이라고 한다. 너클볼로 통산 200승을 거둔 팀 웨이크필드의 은퇴 기자회견에서 그는 필 니크로, 조 니크로, 찰리 허프, 톰 캔디오티 등 선배 너클볼 투수에게 감사를 전하며 R.A. 디키를 너클볼의 명맥을 이어갈 선수로 언급한다.
다큐멘터리 'Knuckleball!' 시사회에서의 전, 현직 너클볼 투수들. Charlie Hough, R.A. Dickey, Tim Wakefield, Jim Bouton (Photo by Craig Barritt/Getty Images) |
좋지 않은 가정 환경에서 자란, 팔꿈치 인대가 없는 야구 선수가 수많은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가족과 종교, 그리고 인생의 갈림길마다 지침이 되어 준 멘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야구 선수로서의 정체성을 찾게 해준 프레드 포핸드 감독, 자신의 어릴적 상처와 아내와의 불화를 극복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상담사 스티븐 제임스, 그리고 선배 너클볼 투수 찰리 허프와 필 니크로가 그들이다.
메이저리그에서 통산 373승을 거뒀으며 명예의 전당 첫 멤버로 이름을 올린 전설적인 투수 크리스티 매튜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You can learn a little from victory. You can learn everything from defeat. (승리를 통해서는 조금 배울 수 있지만, 패배로부터는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 빛나는 승리보다 패배가 훨씬 많았고, 마이너리그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그야말로 이 명언에 적합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재미있다는 것이다. 간결한 문장과 흥미로운 구성은 공동 집필자인 웨인 코피의 도움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자신이 던지는 공과 비슷한 삶의 궤적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용기와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없었다면 이 책은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회고하는 기간의 절반 이상이 흑역사에 가깝지만 그는 결코 유머를 잃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삶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걸어온 한 사람에게 감동을 느낄 것이고, 야구를 모르는 독자라도 R.A. 디키의 팬이 될 것이라 장담한다.
그의 인생을 엿보고 난 지금, '어디서 공을 던지더라도' 그가 최선을 다할 것이란 걸 알고 있다. 그의 메이저리그 통산 승수는 올해 8월까지 71승으로, 필 니크로의 318승은 물론 팀 웨이크필드의 200승을 넘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야구 팬으로서, 유일하게 남은 너클볼 투수인 그의 투구를 오랫동안 보고 싶다. R.A. 디키는 올 시즌 8월 마지막 경기에서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6.1이닝 2실점으로 10승째를 거둬 2년 연속 10승 투수가 되는 소중한 기록을 세웠다. 이번 시즌 그의 성적은 현재까지 10승 12패로 여전히 승보다는 패가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