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4일 일요일

Before Sunset

수많은 인상적인 대사들과 아름다운 장면들로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비포 선라이즈'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그들을 담아내던 순간이 아니었다. 영화의 마지막, 두 사람이 반나절동안 지나쳤던 장소를 하나하나 다시 짚어가는 카메라는 그 짧은 시간동안 그들이 얼마나 멋진 시간을 보냈는지를 수십마디 대사보다 더 끝내주게 이야기 해 준다. 그 순간만큼은 영화 밖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제시와 셀린느는 한명은 버스에서, 한명은 기차에서 창 밖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음을 짓는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감성은 특별하다. 짧게 이야기하면 하룻밤동안의 원나잇 스탠드 정도로 정리될 수도 있을만한 이야기. 먼 곳으로의 여행은 늘 사람을 어느정도는 들뜨게 하니까. 하지만 그는 독특한 대사의 리듬과 내용, 그들의 미묘한 감정선들을 놓치지 않고 잘 따라가면서 그들의 하룻밤 사랑을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인생에 있어서 잊혀지지 않는 경험으로 만드는 솜씨를 보여준다.  

아뭏든, 제시와 셀린느가 그렇게 9년만에 다시 만났다. 9년 전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들의 만남을 위해 별다른 설명은 필요치 않다. 그저 그녀가 그를 보려고 찾아왔을 뿐. 두 사람이 만나기 전의 짧은 시간동안 카메라는 앞으로 두사람이 한시간여 동안 지나치게 될 곳들을 슬쩍 미리 거꾸로 되짚어서 그들이 만나게 되는 작은 서점으로 이동한다.



9년의 세월을 한꺼번에 만회하리라 마음먹기라도 한 듯, 그들은 9년 전보다 훨씬 더 많은 단어를 짧은 순간동안 멀미 날 정도로 쏟아낸다. 9년 전에 비해 산만한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그 긴 시간을 생각해보면 그들이 본론으로 들어가기까지 소비한 시간은 지나칠 정도로 짧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만나서 한시간도 채 되지 않아 두 사람은 9년 전의 하루가 그들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또 어떤 것들을 잃어버렸는지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한다. 제시는 자신의 의미없는 결혼생활에 대해 탄식하며 약속한 날에 나타나지 않았던 그녀를 원망하고, 셀린느는 그를 만난 이후로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더이상 로맨틱한 사랑을 찾을 수 없었다며 투정을 부린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어차피 더 나아가봐야 불륜... 각각 자신의 방식대로 그 두사람을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를 두 사람의 아내와 남편에 대한 배려는 두 사람이 회포 풀기에도 바쁜 시간동안 끼어들 틈 전혀 없이 거추장스럽기만 하고. 줄곧 결국 서로를 찾아 헤메던 시간들을 설명해주기 위한 양념처럼 곁들여져 있을 뿐이다.


그래. 그래도 그럴 수 있다. 날마다 이어지는 의미없는 일상, 무미건조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나타난 멋진 옛 사랑. 영화같은 로맨틱한 하룻밤을 보냈던 그 사람을 다시 만났을 때 마음 한구석 동요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참 재미없다고 느껴질 때마다 그 아름답기만 한 기억이 마음 속을 비집고 들어와 오랜 시간동안 되풀이해 반복되었다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이들을 이해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생각으로 불편해질 법도 한데. 역시 그런 불편함을 잊게 해주는 건 보일 듯 말듯 잠깐 잠깐 내비치는 그들의 감정을 놓치지 않고 찰나의 느낌에 무한한 생명력을 불어넣는 카메라의 시선이다... 9년 전이나 지금이나 외면하기 힘든 달콤한 선물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시선을 느끼며 셀린느의 집 계단을 오르고,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쓸데없는 기대따윈 버리라고 쏘아붙이던 그녀는 그를 위해 직접 만든 노래를 부르며 그를 살살 유혹한다. 게다가 재즈 싱어 흉내를 내고 춤을 추며 떠는 귀염까지. 그녀에게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일지라도 충분히 매력을 느낄만한 행동인데, 하물며 제시야. 
영화는 이 지점에서, 두 사람은 6개월 뒤에 다시 만나게 될까, 아닐까를 묻는 것 자체를 그다지 의미없게 만들었던 전작과는 사뭇 다른 결말을 보여준다. 

"근데, 너... 이러다가 비행기 놓치는 거 아냐?"
"나도 알아." 

아마 제시는 떠나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그 사실을 셀린느도 충분히 알고 있었겠지. 그리고 그 다음은... 글쎄...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 

9년이나 지난 지금, 나만큼이나 나이를 먹어버린 두사람. 애초부터 이전처럼 쿨한 결말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 지점에서 영화는 빛을 잃고 현실로 내려앉는다.

이제는 좀 나이들었지만 두 사람의 모습을 다시 한 곳에서 본다는 것만으로 반가운, 그들의 재회에 대한 소고는 여기까지.


2005.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