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31일 목요일

우리에겐 더 많은 위로가 필요하다.

출근길에 지하철 계단을 오르는데 문득 구두를 보니 앞코가 뿌옇다. 며칠 전부터 닦아야지 생각했는데 일이 많은 연말이라 영 시간이 나지 않던 참이었다. 근처에 보이는 구두 닦이 노점에 들어갔다. 나이 지긋한 부부가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손님을 맞는다. 구두를 건네고 삼선슬리퍼를 신고 구석에 앉았다. 쌀쌀한 날씨지만 전기 난로가 피워진 노점 안은 훈훈하다.

닳아빠진 뒷굽을 갈 때도 된 듯해 수선을 부탁했다. 아저씨가 돋보기 안경을 걸쳐 쓰고 구두의 상태를 확인하는데 오른짝 가죽과 밑창 이음새가 떨어져 구멍이 나있다. 저 상태로 잘도 신고 다녔구나. 아저씨는 혀를 쯧쯧 차고는 연장통에서 순간접착제를 꺼내 익숙한 손길로 떨어진 이음새에 꼼꼼이 칠하기 시작했다. 접착제가 마를 때쯤 손가락에 헝겊 조각을 야무지개 감고 구두약을 묻혀 문지르니 금새 광이 난다.

구멍난 이음새가 접착제만으로 수선이 될까 싶었는데, 손질이 끝난 구두를 살펴보니 그럭저럭 신을 만했다. 노점을 나와 다시 바삐 걷는데 어째 좀 처량한 생각이 든다. 구두 닦을 여유도 없이 구멍이 난줄도 모르고 한참을 신고 다녔다니. 참 정신 없이 바쁘게도 일했다.

- 구두를 닦았는데 한 짝 옆이 터져 있어서 접착제로 붙였어요. 굽을 간 김에 아까워 좀더 신는데 오래는 못 갈 것 같아요.

점심 시간에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고, 바로 아내의 답신이 왔다.

- 이런... 구두 하나 당장 사야겠어요. 진즉 샀어야 했는데.

아내에게 문자를 보낸 건 내 처량한 심정을 알아줬으면 하는 바램 때문이었다. 이런 유치한 바램을 넌지시 표현할 상대로 아내 말고 또 누가 있을까.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업무가 늘어나 심신이 지쳐가는 중에, 짧게 오고간 문자만으로도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구두야 뭐 좀 있다 사도 되지.

위로라는게 그런 것 아니겠는가. 내가 힘들 때 누군가 그걸 알아준다는 것. 위로의 출발점은 바로 그 지점부터이다. 더 좋은 해결책을 찾아준다거나 건설적인 조언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굳이 그렇지 않아도 된다. 내 힘듦을 그가 알고있다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

- 그 영화 아주 잘 만들었다더라.

주말에 올라오신 장인께서 식사 중에 갑작스레 언급하신 건 관객 수 천만을 훌쩍 넘겼다는 그 영화였다. 이런 말씀은 영화를 보고싶다는 속내를 에둘러 표현하신 것이다. 아내도 나도 보지 않은 영화라 잘됐다 싶어 식사를 마치고 다같이 iptv를 볼 수 있는 작은 방에 둘러앉았다.

고향이 이북인 장인은 46년생이시니 전쟁이 벌어진 해에 다섯 살이셨다. 흥남 부두의 철수를 직접 겪진 않으셨지만 전쟁 이후 부산에서 주욱 사셨고 베트남전에도 참전하셨으니 영화 속에서 그려진 시대를 고스란히 지내오신 셈이다. 워낙 화제가 되었던 영화라 대략 내용은 알고 있었기에 장인께서 보고싶어하시는 것도 이해가 갔다.


훌륭한 영화는 아니었다. 몇몇 배우들의 호연이 있었지만, 캐릭터는 전형적이고 플롯은 엉성했다. 그래도 두 시간동안 지루함을 느끼진 못했고 이산가족 상봉 방송 장면에선 눈물도 났다. 하긴 50년 이후 이 나라의 현대사 자체가 숨이 찰만큼 극적인 드라마인데 그 가운데 굵직굵직한 사건을 주욱 되짚기만 해도 지루할 틈이 있겠는가.

장인은 영화를 보는 중에 종종 탄식 비슷한 소리를 내셨다. 어허,,, 그 참, 어허,,, 그 참. 말은 안하셨지만 당신이 젊었을 적 풍경이 재현된 화면을 보며 옛날 생각이 나셨으리라. 영화와 장인의 반응을 함께 경험하며 이 영화가 왜 화제가 되었는지, 왜 천만 명이 넘는 관객이 든 몇 안되는 영화에 꼽히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대중의 취향과 흐름을 저격하는 감독의 재능은 역시 뛰어났다.

'Ode to My Father'인 영문 제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아버지 세대에 대한 연민의 감정으로 만든 영화라고 했다. 감독의 의도대로 이 영화가 아버지들을 위로해주었을까. 이만하면 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하고 울먹이는 덕수를 위로한 사람은 아버지의 환영 뿐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내 이야기를 해주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익숙치 않았던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은 영화를 보며 조금은 위로를 받았을 것 같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퍽퍽했던 시대에 온 몸으로 가족을 지탱해 온 우리의 평범한 부모들이 그동안 제대로 된 위로를 받은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이 영화를 향한 대중의 이상(異常)적 열광은 제대로 위로하지 못했음에 대한 자기 고백이 아닐었을까 싶다.

2015년 12월 13일 일요일

햄, 베이컨, 소시지… 가공육 먹어도 되나요?

최근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는 베이컨과 소시지 등 가공육을 1군 발암물질로 규정해 발표했습니다. 이 발표 이후 이 내용을 보도한 기사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는데, 그 내용은 가공육이 담배나 석면만큼 위험한 발암물질로 분류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WHO가 발암물질로 구분한 식품에는 햄과 베이컨, 소시지와 함께 핫도그, 햄버거 등도 포함되었습니다. 햄이나 소시지는 아이들의 도시락 반찬으로도 흔히 쓰이는 식품입니다. 물론 가공육이 건강에 이로운 식품은 아니라는 것은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과연 소시지를 먹는 것이 담배를 피우는 것만큼 암 발생 위험을 높일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1군 발암물질에는 담배, 석면, 벤젠과 같은 전통적인 위해 물질이 포함되어 있으며 가공육이 이들 물질과 같은 군에 포함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1군에 포함된 물질들이 모두 같은 정도의 위험이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영국 암 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모든 암의 19%가 흡연으로 인해 발생하는 반면, 가공육 섭취로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분율은 3%라고 합니다.

모든 영국인이 담배를 끊으면 64,500례의 암 발생을 줄일 수 있으며, 가공육을 끊으면 8,800례를 줄일 수 있습니다.(Cancer Research UK의 그래픽) 


WHO는 발암물질을 1군부터 4군까지로 나누고 있는데, 그 기준은 발암물질과 암의 관련성이 얼마나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가 입니다. 기존 역학 연구들을 검토했을 때 사람에서 암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경우에 1군에 포함됩니다. 또한 충분한 근거는 없지만 암과의 관련성을 의심할만한 근거가 있는 경우는 2, 위험성이 약한 경우는 3군 이하로 분류합니다. WHO의 발표에 대해 일부 언론들은 가공육을 ‘1(group)’이 아닌 ‘1(grade)’ 발암물질로 보도했는데 이러한 부주의한 보도가 논란을 키운 면이 있습니다. 관련성이 확실하다는 의미의 발표가 위험의 정도가 크다는 의미로 해석된 것입니다.

가공육 제조 과정 중 형성되는 N-nitroso compound, polycyclic aromatic hydrocarbon 등의 화학 물질로 인해 암 위험이 높아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 확실한 기전은 잘 모릅니다. 많은 국내 전문가들은 가공육을 과다 섭취하지 않으면 괜찮다고 합니다. 지나친 육류 섭취가 심혈관질환, 암 등의 질병 위험을 증가시킨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며, 가공육에 대한 이번 1군 발암물질 분류에 과민 반응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WHO의 이번 발표에 따르면 가공육 50g을 매일 먹는 것이 대장암 위험을 18% 높인다고 합니다. 50g은 핫도그형 소시지 1, 비엔나 소시지 5, 슬라이스 햄 5장 정도입니다. 하지만 국민건강영양조사(2010~2012)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1일 가공육 섭취량은 6g 정도에 불과한다고 하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참고로 섭취량 상위 5% 이내에 든 사람은 하루 14g, 1% 이내인 사람은 151g을 섭취한다고 합니다. 이 정도로 많이 먹는다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겠지요


참고: http://www.who.int/features/qa/cancer-red-meat/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