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6일 토요일

시간

컴퓨터 촬영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안좋았다.

대장의 커다란 종양은 단층 이미지에서도 뚜렷하게 눈에 띄었고 복강 내에 다발성 림프절 전이가 있었다. 처음엔 다른 사람의 촬영 결과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더 큰 문제는 폐에도 전이가 의심되는 소견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 부분은 다시 정밀 검사가 필요하겠지만, 복강 내 상태를 볼 때 십중팔구는 폐 전이일 것이다.

대장암이 다른 장기에 원격 전이 되었을 때 5년 생존율은 일반적으로 20% 미만. 불안한 표정으로 앞에 앉아있는 이 40대 여성을 5년 뒤에도 볼 수 있는 확률이 20%가 채 안된다는 뜻이었다. 부인과 검사 결과를 흝어보았다. 자녀는 2명. 5년 뒤면 아이들이 몇 살이 될까. 아마 성인은 아닐 것이다.

  검사 결과가 좋지 않네요.

잠깐의 침묵. 그리고 검사 결과와 앞으로의 대략적인 과정을 조목조목 알려주었다. 환자는 외과에 입원을 하게 될 것이고, 몇 가지 검사 후에 치료 방침이 결정될 것이다. 수술로 어느 정도 절제가 가능한 상태라면 생존율은 꽤 높아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좋은 예후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어떤 상태이든 항암 요법은 필수일 것이다.

  완치는 가능한 건가요.

지금은 치료 결과에 대해 확실한 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일단 외과에서 정밀 검사를 해봐야 좀더 정확한 상태를 알 수 있어요.

  수술을 하면 괜찮은 거겠지요?

애가 타는 표정으로 앞에 앉은 낮선 의사로부터 무언가 더 희망적인 이야기를 기대하며 떨리는 말투로 되풀이해 묻는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다.

  갑작스런 결과에 힘드실걸로 알아요. 앞으로 저희 의료진이 치료에 최선을 다할겁니다. 최대한 빨리 치료를 받으실 수 있도록 해드릴거에요.

황망한 표정으로 진료실을 나가는 환자를 보며 생각했다. 그녀의 일생에 있어 가장 충격적일 수도 있었던 대화를 나눈 시간은 십오분 남짓. 앞으로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일까.

*

오전 진료를 끝내고 연구실에서 밀린 잡무를 하는데 문자메세지 알람이 울렸다. 오랜 친구 P의 문자다.

그는 기숙사 생활을 함께 했던 대학 친구였다. 전공은 달랐지만 일년간은 함께 살았었고, 대학 시절엔 꽤 친한 사이였다. 종종 밤을 새워 함께 술을 마시는게 일상이던 시절이었다.

그가 오랜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졸업을 할 무렵이었다. 자가면역질환이었는데 최종적으로 밝혀진 진단은 그 중에서도 질이 좋지 않은 종류였다. 그 계통의 병이라는게 원래 전신에 시도때도 없이 다양한 증상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는 자주 아파했고, 늘 약을 먹었고, 평생 그런 상태를 안고 살아야할지 모른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쾌활한 편이었다.

졸업 후엔 한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몇 년이 지나 뜬금없이 그가 연락을 해왔고, 그날 우리는 이전처럼 또 밤을 새워 술을 마셨다. 앞으로는 자주 좀 보자고 다짐했지만 그날 이후에도 일년에 고작 한두차례 보는게 전부였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 사이의 관계란게 그렇다. 가끔 잊을만할 때 쯤이면 그에게 전화가 왔고, 약속을 정해 얼굴을 보곤 했다. 그러고보니 최근 몇 년간 내가 먼저 연락은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요즘 몸은 좀 어때?

  좋진 않아. 뭐 늘 그렇지. 그 병이 낫는게 아니잖아.

  난 이번 달엔 좀 바쁜데. 다음 달에나 시간이 날 것 같네. 넌 스케줄이 어때?

  난 요즘 아무때나 괜찮으니 신경쓰지 말고 너 편할 때로 해.

  어쩐 일로 그리 한가하셔?

  요즘은 바쁘게 살면 뭐하나 싶네. 허무하기도 하고. 몸이 아파서 그런가.

짧은 문자였지만 어째 느낌이 이상했다. 병세가 많이 심해진건가. 그는 내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왔기에 가끔씩 그가 본인의 검사 결과나 질병 상태에 대해 궁금해할 때는 전자 차트의 기록을 확인하고 다시 설명해주곤 했다. 내가 담당 의사는 아니었지만, 대학병원의 외래 진료 시간은 환자 입장에선 늘 부족하기 마련이니까.

차트를 열어 P의 최근 진료 기록을 살펴보았다. 원래 앓고있던 병의 상태는 이전보단 나빴지만 예상할 수 있는 정도였다. 괜한 걱정이었나. 조금 더 과거의 기록을 보기 위해 마우스의 스크롤을 내렸다. 늘 진료받는 류마티스내과 외에 소화기내과 진료 기록이 눈에 띄었다. 진료 시기는 몇 개월 전이었는데, 진단명을 보고 가슴이 덜컥했다.

HCC (Hepatocellular Carcinoma). 간암이었다. 이미 진단 후 한 차례 고주파열치료를 받은 상태였다. 그러고보니 그가 간염 보유자였던게 생각났다.

  그런 거였구나.

그가 보낸 짧은 문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 자신이 건강하다고 느낀 적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병이 조금씩 조금씩 진행하는 걸 느끼면서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럭저럭 잘 견뎌왔는데, 지금 이런 소식을 알게 된다는 건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지.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아이 둘의 아빠이고, 내 기억이 맞다면 아이들은 초등학생이다. 몇 년 전 봤던 그의 아내와 아이들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에게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생의 남은 시간은 몇 년이나 될까.

문득 내가 앞으로 P를 몇 번이나 더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캘린더를 열어 앞으로의 일정을 확인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예정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메일을 보낼 참이었다. 굳이 기존에 잡힌 일정을 취소하려 한 것이 그동안 내가 먼저 연락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는지, 아님 몇 년이 지난 후에 지금보다 더할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려는 얄팍한 생각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다음 월요일 저녁의 몇 시간이 나보다는 그에게 훨씬 더 의미있는 순간이 되리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