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26일 월요일

더러운 손의 의사들 'On the Take - How Medicine's Complicity with Big Business Can Endanger Your Health'

철모르던 전공의 시절에, 저녁에 전공의실에 남아있으면 가끔 모 외국계 제약회사 직원분이 살짝 문을 노크하고 들어와 조심스레 "선생님, 저녁 안드셨으면 저희 도시락이 좀 남아있는데 드시겠어요?" 하고 묻곤 했다.

도시락도 급수가 있는데, 그 직원분이 가져다주는 도시락은 매우 상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활짝 웃으며 공손하게 말을 건네는 그 여직원이 건네주던 도시락은 힘든 하루에 저녁도 못먹고 퍼져있던 나를 비롯한 여러 전공의들에게 비타민과 같은 존재였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에 늘상 피곤에 쩔어있는 전공의나 전임의들을 대상으로 마음을 움직이는(영업을 하는), 비용 대비 효율이 좋은 방법은 역시 맛있는 먹거리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 제약회사와 그 직원이 담당하던 약품에 대한 인상이 덩달아 좋아지기도 했다. 도시락을 먹은 다음날 새로 해당 계통의 약을 처방해야 할 일이 생기면 그 회사의 약을 좀더 처방하기도 했던 것 같다. 비슷한 효과에 가격도 별 차이가 없다면 내게 따뜻한 도시락을 주었던 직원의 약을 써주는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 약은 대개 장기적으로 복용을 하고 때론 평생 먹기도 하므로 아마 그때 내게서 처방을 받고 지금까지 먹고있는 환자분들도 계실 것이다.

전공의 시절부터 처방했던 그 약은 현재도 세계적으로 판매량이 매우 많은 약이고 나 스스로도 자주 처방하고 있지만 지금 처방하는 이유는 그 직원이 주었던 도시락 때문은 아니다. 임상 경험이 쌓이고, 내 환자에 대해 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넓이가 커지면서 제약회사의 도시락이나 판촉물은 내가 약제를 선택하는데 훨씬 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의바른 제약회사 직원분들이 제공하는 도시락이나 식사를 먹는 일은 지금도 종종 있는 일이다.

문득 오래 전의 도시락을 떠올리게 된 것은 최근 읽었던 이 책 때문이다. NEJM의 편집장이었던 제롬 캐시러가 집필한 이 책에서 저자는 기업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환자보다 스스로와 기업의 이익을 우선 순위에 놓고있는 일부 의사들에게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다. 책 말미에 그는 의료계에 만연한 탐욕을 없애기 위한 로드맵을 제안하는데, 그 첫번째 항목은 다음과 같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7203913


1. 기업으로부터의 모든 선물을 배제한다. 의사가 진료하고 교육하는 데 유용한 것일지라도 선물은 받지 않아야 한다. 또한 의사들은 기업이 후원하는 대변인 부서에 참여하지 않는다.


2013.11.

2014년 5월 20일 화요일

환자 편에 서기

콜레스테롤이 높아 진료를 받아오던 60대 여성 환자. 항상 다소곳한 태도로 조용히 다녀가시던 분이었는데 오늘은 진료실을 나가기 전에 뭔가 할 말이 있는지 머뭇거린다.

 “저… 제가 뇌 MRI 검사를 해야할까 싶어서요.”

노년의 환자 스스로 먼저 이런 말씀을 할 때는 대개 치매에 대한 걱정이 이유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실제 검사가 필요한 경우는 많지 않다. 잘 알던 사람 이름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다거나, 물건을 둔 곳을 잊고 한참을 찾아 헤맸다는 등의 비슷비슷한 에피소드를 잘 들어주고 나이에 따른 건망증이니 치매 걱정은 덜으셔도 된다고 안심시키면 환자는 밝은 표정으로 진료실을 나간다. 그럼 상황 끝.

“어떤 문제가 있으세요?”

“가족들이 검사를 해보라고 하네요.”

본인이 아닌, 가족이나 지인이 검사를 권하는 경우는 주의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환자의 기억력이나 행동에 문제가 있다면 단순한 건망증이 아닐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환자 대기 리스트를 보니 시간에 여유가 있는 편이다. 좀더 대화를 나누어보기로 했다.

“검사를 권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제가 이전과 달라져서인 것 같아요. 예전엔 가족들 돌보면서도 집안 대소사를 다 챙겼는데. 이전보다 기억력도 떨어지고, 행동도 굼떠지고…”

“스스로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해보면 자기들은 더한다고 그래요. 나이 들면서 그 정도 변화야 당연한 것 아니냐고. 친구들 사이에선 지금도 제가 참 적극적인 편이고 모이면 즐거운데, 가족들에겐 미안하기도 하고 자꾸 위축이 되요.”

가족에 대해 좀더 물어보았다. 남편은 모 회사의 중역이였고, 30대의 두 딸은 둘 다 번듯한 직장을 다니고 있고, 미혼이었지만 부모와 따로 살고 있다 했다.

“딸들이 엄마가 뒤쳐지는 게 싫다고 그래요. 예전엔 그렇게 똑똑했던 엄마가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다고. 컴퓨터나 스마트폰도 잘 다루지 못하고… 제가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새로 배우는 거 참 잘했거든요.”

“남편분은 뭐라 하세요?”

“남편은 나이 들수록 더 머리를 쓰고 노력해야 하는데 왜 노력을 안하냐고 그래요. 남편이나 저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다는 대학들을 나왔고, 젊어서는 제가 남편보다 더 머리도 좋고 계산도 잘 했어요. 남편은 지금도 회사 경영을 하고 있는데 저는 집안일만 하다 보니 저만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 같네요. 책도 읽고 이런저런 공부도 해보려 하는데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아서 힘들어요.
사실 제가 가족들 몰래 보건소에서 치매 검사를 받았어요. 거기 선생님이 결과가 좋다고, 치매 걱정은 안해도 된다고 해서 기분좋게 집에 돌아갔지요. 딸들에게 슬쩍 이야기했더니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어요. 그런 반응을 보니 자존심도 많이 상하더라구요. 애들은 다들 독립해있지만 막상 무슨 문제가 생기면 아직도 엄마가 도와주길 바라면서…”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녀는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남편과 딸들에게 서운함을 말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어느 정도 기억력과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의 자존감을 떨어뜨린 것은 자신의 기억력이 아니라 가족들로부터 느끼는 소외감이었다.

진료실에서 지키는 내 사소한 원칙 중의 하나는 가능한 한 환자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다. 물론 항상 환자가 옳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의 입장을 공감하고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도록 격려해준다는 의미이다. 내 역할은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찾아온 환자를 돕는 것이기에. 이 환자의 경우엔 그런 원칙을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저 마주앉아 한시간쯤 신나게 남편과 딸들을 함께 씹어주고 싶어졌다.

MRI 검사는 필요 없을 것 같다고 하니 가족들 이야기를 하며 어두워졌던 표정이 조금 밝아진다.

“그럼 선생님 말씀 믿고 갈께요.”

진료실을 나가는 그녀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남편분 밥 차려주지 마시구요. 따님들은 혹시 결혼한다 하면 혼수는 본인들이 알아서 장만하라고 하세요.”

“아유 참 선생님도.” 환한 표정으로 킥킥거리며 내게 엄지손가락을 쑥 세우고 돌아서는 그녀를 보며, 진료 끝나고 어머니께 전화라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