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6일 화요일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 읽었던 정아은 작가의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


이만큼 솔직한 글쓰기 책은 없다는 카피가 어울리는 내용이라 생각했다. 솔직함과 자기 비하의 경계를 위태롭게 넘나들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아 좋았다. 읽으면서 여러 번 킥킥거리며 웃기도 했다. 글쓰기 경험에선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한 내 입장에서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많았다. 인상깊었던 몇 가지 내용을 적어본다. 기억에만 의존한 내용이라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 책의 첫머리에서는 잘 써야 한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나아가 '잘 쓰지 않겠다'고 다짐해야 한다고 말한다. 잘 써야 한다는 욕심에 사로잡히면 초고 자체도 아예 쓰지 못할 수 있다. 나도 머릿 속의 생각이 내 손을 거쳐 활자화 되는 순간에 그 문장의 조악함과 유치함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경험을 종종 한다. 머릿 속을 맴도는 아이디어는 왜 그대로 멋지게 옮겨지지 않는 걸까 괴로워하다 보면 어찌어찌 써냈던 몇 줄의 문장도 그냥 깔끔하게 지우고 새로 시작하는 게 나을 거란 유혹에 무릎을 꿇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고를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방점은 '초고'보다 '완성'에 찍힌다. 유치함과 설익음, 비문 투성이의 글이라 해도 일단 초고를 끝까지 써야 한다는 것.

- 퇴고는 초고의 완성보다 더 중요하다. 내가 쓰고 나서 괜찮다 생각했던 글이 다음날 다시 읽어보면 눈뜨고 못봐줄 글이 되어있는 경우도 더러 있다. 내 경우 여러 번 퇴고를 거친 뒤라 해도 그 글을 한 번 더 봤을 때 퇴고가 필요없을 정도로 완벽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퇴고는 여러 번 할 수록 좋다. (그러려면 초고를 빠르게 완성해야겠지...)

- 글을 쓰는 이유는 인정욕구이다. 일단 깊게 동감하고. 내 경우엔 글을 쓰면서 생각이 정리되는 경험을 할 때가 많다. 어렴풋한 느낌으로만 실재하던 생각이 글을 쓰다보면 명확한 형태를 갖추게 되고, 내가 이래서 그렇게 느꼈구나 하고 이유를 알게 되기도 한다. 내게 글쓰기란, 갖추어진 생각을 단순히 글로 바꾸는 과정이 아니고, 뒤죽박죽 정리가 안 된 상자 한 구석을 뒤져 꺼낸 찰흙덩어리를 요모조모 살펴보며 그 안에 숨겨진 본래 모양을 깎아내는 작업에 가까울 때가 많다. 그 작업은 대개 힘들고 수고롭지만 내 생각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즐거움과 경이로움을 느끼기에 다시 무언가를 쓰게 된다.

- 칼럼, 에세이, 논픽션, 소설을 집필하는 자세와 방식의 차이. 글의 형태와 목적에 따라 달라지는 작업 방식이 흥미로웠다. 내 경우에도 논문이나 교과서와 같은 학술 원고와 에세이는 차이가 크다. 이과생의 글쓰기와 문과생의 글쓰기라고나 할까. 양쪽의 모드를 스위치를 켜고 끄듯이 쉽게 바꿀 수 있다면 좋을텐데 딱딱한 글쓰기 모드에서 말랑말랑한 글쓰기 모드로 바꾸는 게 쉽지 않다. 내게 불가능해 보이는 이런 일을 어떤 이들은 너무나 쉽게 해내는 듯 보인다. 분명 의학을 다룬 책임에도 유려한 문체와 문학적 향기로 감탄과 질투를 자아내는 글도 있다. (이런 문장으로 채워진 책은 보통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오르거나 퓰리처상을 받는다.)

- 작가를 둘러싼 사람들, 그중에서도 편집자에 대한 글에서도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책 두 권을 쓰면서 네 명의 편집자를 만났는데, 모두가 예의바르고 성실한 분들이었다. 겨우 네 명의 편집자를 만나면서도 편집자가 어떤 일을 하는지 내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편집자의 세계는 지금 내가 알게 된 것보다 훨씬 넓고 깊다는 생각을 한번 더 하게 되었다. 마음 한 구석이 뜨끔거리기도 했다. 나는 그들에게 괜찮은 저자였던가? 출판의 세계에 대해 쥐뿔도 모르면서 내 글의 주인이라는 생각에 은근슬쩍 자만과 허영을 내비치지는 않았던가?

- 정아은 작가님의 책은 오래 전 읽었던 '잠실동 사람들'이 전부였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이었고, 작가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내가 살고있는 동네라 슬쩍 호기심이 들어 빌려왔었고, 잠실이라는 동네에 사는 인간군상을 꽤나 사실적으로 그렸구나 하고 생각했던 걸로 기억한다. 주말에 들렀던 서점에서 그의 다른 책 한 권을 더 샀다.

2023년 11월 9일 목요일

어느 '저자의 말'

반딧불 의원의 이야기를 엮은 첫 번째 책이 나온 이후 벌써 오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채널예스에 연재를 시작한 때부터 치자면 육 년입니다. 시간은 속절없이 빠릅니다. ‘첫 번째’란 말은 곧 첫 번째에 그치지 않음을, 그러니까 ‘두 번째’가 존재함을 의미하겠지요. 반딧불 의원의 두 번째 책에 실릴 저자의 말을 쓰면서 이제는 첫 번째라 불리게 될 책을 만들던 때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밤에 여는 작은 의원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으로 묶이는 과정을 그저 놀랍고 기쁘게 지켜보던 그때는 저자의 말을 다시 쓰게 되리란 기대를 감히 품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반딧불 의원의 이야기가 어딘가에서 실제로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했습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작은 진료실이 있는 동네의원과 그곳을 찾는 환자들의 사연은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반딧불 의원의 이야기를 이어서 써봐야겠다는 생각도 조금씩 생겼지만 금세 실행에 옮기진 못했습니다. 그러다 재작년 해외연수로 이전보다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면서 다시 연재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일 년이면 초고를 완성할 수 있겠지 생각했는데 막상 책으로 엮어낼 만큼의 분량을 더 쓰는 데에 반년이 더 걸렸고, 이후로 책 출간까지 또 일 년이 지났습니다. 늘 그렇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빠릅니다.

전문의가 된 뒤로 줄곧 대학병원에서 일하고 있지만 동네의원 의사의 꿈이 있었습니다. 그게 꼭 밤에만 여는 의원은 아니라 해도. 지금도 가끔 상상합니다. 환자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진료실 밖에서의 사는 모습도 좀 더 들여다보는 그런 작은 의원을. 종종 왕진도 나갈 수 있다면 더 좋겠습니다. 반딧불 의원의 진료실에는 제 사사로운 바램도 조금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 주위를 둘러보면 이런 진료실은 멀지 않은 곳에 실재합니다. 정부의 시범사업을 통해 왕진에 참여하는 동네의원도 조금씩 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이 동네의원에서 단골 환자의 주치의 역할을 묵묵히 하고 있는 의사 모두의 마음을 조금씩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첫 번째 책을 읽은 어느 독자의 후기를 떠올렸습니다. 책에서는 동네의원을 믿고 치료를 잘 받으면 큰 문제가 없다고 하니 마음이 편해지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반딧불 의원이 환자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마법 같은 공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책 속에서처럼 몇 번의 진료로 환자의 문제가 모두 해결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에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질병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진료실에서 환자를 만나다 보면 의사로서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적은지 매 순간 깨닫고 겸손해지게 됩니다. 다만 본문에서 말한 것처럼, 동네의원과 대학병원이 각자의 역할을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는 환경이 환자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합니다. 더 많은 이들이 동네의원을 먼저, 그리고 꾸준히 찾을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Everything happens for a reason.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지난 오 년 동안 도움을 준 이들이 많았습니다. 가장 먼저 생각의힘 김병준 대표와 채널예스 엄지혜 기자께 감사를 전합니다. 두 분이 마련해준 기회가 없었다면 반딧불 의원 이야기도, 두 권의 책도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쩌다 보니 두 권의 책을 내는 동안 김진형, 유승재, 김서영, 우상희, 이렇게 네 분의 편집자와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편집자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제게 재능 있고 성실한 편집자들과의 작업은 큰 즐거움이자 깨달음이었습니다. 지금 제게 편집자란 단어는 이들의 모습을 적당히 합쳐놓은 것을 뜻합니다. 이들은 원고의 교정 이외에 원고의 내용이나 방향에 대해 서도 종종 의견을 주었습니다. 대부분 경우 그 조언을 충실히 따랐는데, 되돌아보면 무엇보다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두 권의 책은 이들과의 공동 저작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모자란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오롯이 제 몫일 것입니다.

첫 책을 함께 작업했던 김진형 편집자께는 좀 더 특별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건강정보를 쉽고 재미있게 전달해보자는 단순한 생각에 지금과 같은 페이크 다큐 형식의 글을 제안해준 이가 그였습니다. 그러니 반딧불 의원은 태생부터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 한 편의 원고를 보낼 때마다 그는 빨간펜 선생님처럼 첨삭과 의견을 더한 답신을 보냈고, 책으로 빚기에 글의 얼개가 부족했던 초창기에 그 피드백은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초고가 과연 읽을만한 것인지 불안해하다 그의 검토를 받고서야 안심을 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가 편집을 담당한 다른 책들을 보면서 첫 편집자로 그를 만난 것이 얼마나 운 좋은 일이었는지 실감했습니다. 그럼에도 막상 첫 책의 마지막 장에 그의 이름이 함께 인쇄되지 못한 점이 늘 아쉬웠습니다. 이 글로 뒤늦게나마 그 아쉬움을 조금은 덜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마지막엔 항상 가족이 있습니다. 아내 지령은 모든 원고의 첫 독자였습니다. 다독가인 그의 객관적인 시각은 원고를 쓸 때 생각하지 못한 점들을 일깨워 주곤 했습니다. 처음 밤에 여는 의원의 이름을 고민할 때 반딧불이란 이름을 냉큼 붙여준 첫째 아이는 어느새 훌쩍 커서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주말 밤 서재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아빠에게 놀아달라 칭얼대던 둘째 아이는 이제 책상 옆 소파에서 얌전히 책을 읽으며 작업이 끝나길 기다릴 줄 아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제게는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반딧불 같은 존재인 세 사람에게 깊은 고마움과 애정을 전합니다.

2023년 초가을에


탕후루란 무엇인가

일주일에 한 번 탕후루 가게에 들른다. 대개 월요일이나 수요일 밤 열시, 매번 같은 시간이다. 

사거리 대로변 프랜차이즈 탕후루 가게는 막 학원 수업을 마치고 나온 아이들로 북적인다. 탕후루 가게 앞에서 아들을 기다리면서 오늘은 뭘 골라볼까 생각한다. 보통은 두 개를 산다. 둘 중 하나는 집에서 탕후루를 기다리고 있는 딸이 고른 걸로. 딸은 요즘 샤인머스켓에 꽂혀있다. 예전엔 일주일에 두세 번씩, 아들을 데리러 올 때마다 탕후루를 사갔는데 밤늦게 설탕 범벅인 간식을 먹는 걸 못마땅해하는 엄마와의 합의를 거쳐 탕후루를 사가는 건 일주일에 한 번으로 줄이기로 했다. 

"블랙사파이어랑 샤인머스켓. 포장이요."

가게 안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과 아이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해 말소리를 높여야 주문을 전달할 수 있다. 주문을 받은 직원이 묻는다. 

"자주 오셨죠?" 

나는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머뭇거리다 한 박자 늦게 그 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비스로 방울토마토 하나 더 드릴께요." 

활기찬 말투였다. 초승달 모양으로 가늘어진 눈매가 웃는다. 옆에서 포장을 담당하는 직원이 재빠르게 탕후루 세 꼬치를 보냉 봉투에 넣었다. 덕분에 그날 밤엔 아이들에 더해 나까지 탕후루를 하나씩 들고 뿌듯해했다. 이후론 매번 그랬다. 두 개를 시키면 하나 더 서비스. 매장의 매니저쯤으로 보이는 초승달 눈매의 직원은 생색을 내는 일도 없었다. 두 개를 주문하고 별다른 설명 없이 포장 봉투를 받아 열어보면 꼬치 세 개가 들어있었다. 

어느 월요일엔 차를 주차하는 골목 안쪽에 새로 오픈한 가게에서 탕후루를 샀다. 요즘 탕후루 가게가 우후죽순처럼 생긴다던데.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가게는 조그마했고 수더분하게 생긴 사장님 혼자 매장을 지키고 있었다. 오픈 기념 할인 행사 중인 그곳에선 설탕 대신 대체 감미료를 쓴다고 했다. 가격도 싸고 건강에도 나을 것 같은 새 가게의 탕후루는 모양은 비슷했음에도 이전에 먹던 그 맛은 아니었다.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가게가 오래 갈 수 있을까. 가게를 열면서 대출을 과하게 받진 않았을까. 매출은 충분할까. 골목은 지나다니는 아이들도 훨씬 적은데.

다음 주엔 다시 대로변 가게에서 탕후루 두 개를 골랐다. 여느 때와 같은 직원이 주문을 받았다. 사실 지난 주에 다른 가게에서 탕후루를 사면서 그를 배신한 것 같아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었다. 주문을 받은 그가 평소보다 더 활기차게 말했다.

"세 개 더 골라보세요. 오늘은 서비스 많이 드릴께요." 

나와 아들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마주보다가 꼬치 다섯 개가 든 묵직한 포장 봉투를 받아들고 가게를 나왔다. 아이들은 신나했지만 나는 마음 한켠이 조금 찜찜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초승달 눈매의 직원이 내가 지난 주에 다른 가게를 갔던 걸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오랜 연인에게 외도를 들킨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딱 한 번 뿐이었는데. 

성경의 루가복음에 등장하는 탕자의 이야기도 떠올랐다. 집을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하던 탕자가 알거지가 되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너그러이 용서하고 환대를 베푼다. 매장을 닫을 시간이 다 되었으니 어차피 남을 상품으로 단골 고객에게 인심을 썼을 뿐일 거라는 생각도 탕후루 세 개만큼의 용서와 환대를 받은 내 찜찜함을 지우진 못했다. 골목 안 조그만 가게의 사장님도 떠올랐다. 분명한 것은 그 사거리에서 이제 다시는 골목 안 가게를 포함해 다른 탕후루 가게에 가진 못할 것이란 사실이었다.   

그러니 그날 밤, 아이들이 때아닌 탕후루 파티를 벌이는 동안 나는 바삭이는 설탕 코팅과 입안을 가득 채우는 과즙을 느끼며 자문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탕후루란 무엇인가.

2023년 11월 1일 수요일

꿈 이야기

지지난 토요일, 진료 중에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딸은 심심하다고 전화하기도 하지만 아들은 필요한 경우에만 전화를 한다. 학교를 안가는 토요일 아침이라 늦잠을 잤을텐데, 여느 토요일보단 이른 시간이다. 이럴 땐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마음 한켠이 덜컹한다. 마침 다음 환자가 들어오기 전이라 급히 전화를 받았다.

조급한 내 마음과 달리 아들 목소리는 느긋하다. 그날 오후에 기차를 탈 예정이었는데, 기차 시간과 언제 출발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막상 별것 아닌 용건임을 확인하자 긴장이 풀리며 살짝 짜증이 났다. 간단히 출발 시간을 이야기해주고 끊으려는데 아들이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지 말끝을 흐리고 우물쭈물한다.

"아빠 진료 중인데, 더 할 말 있니?"

"응...... 그게...... 이상한 꿈을 꾸었어."

"무슨 꿈인데?"

아들이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무슨 꿈을 꿨길래.

"꿈에서...... 아빠가 죽었어. 아빠가 죽는 꿈을 꿨어."

그러더니 서럽게 운다. 순간 당황스럽기도 하고 좀 우습기도 해 뭐라 답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엔 환상과 실재가 뒤섞여 실제로 겪은 일보다 더 생생하고 또렷하게 각인되기도 한다. 구체적인 내용이 잊혀진 뒤에도 그때 느꼈던 감정과 기분은 오래 남는다.

훌쩍임은 이내 잦아들었다. 중학교 3학년. 터져버린 울음이지만 악몽을 꾸었다고 계속 울기엔 너무 커버린 아이다.

아빠 괜찮다고, 좀 이따 집에서 보자고 아이를 다독이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정신없이 진료를 마치고 집에 가면서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이들이 어렸을 때, 종종 자는 모습을 한참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다 덜컥 겁이 날 때가 있었다.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는 행복과 동시에 소멸과 부재에 대한 불안을 느끼게 한다는 걸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어느 트로트 가사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마음을 노래했는데 아이들의 자는 모습이 딱 그랬다. (물론 깨어 있을 땐 반대의 경우도 자주 있다.)

좀 유치하지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이들을 키우며 수백 번은 느꼈을 그 아이러니한 감정에 대한 약간의 보상을 받은 느낌이랄까.

2023년 7월 8일 토요일

밤 열시, 은마아파트 사거리

누군가 밤 열 시경에 은마아파트 앞 사거리를 지나는 경험을 처음 한다면 아마 눈앞의 풍경에 놀랄 것이다. 밤 늦은 시간임에도 도로의 정체는 퇴근길 러시아워를 방불케 한다. 왕복 8차선 도로와 인도는 차량과 사람으로 가득하다. 보행 신호등이 켜질 때면 백 명은 족히 될 듯한 수의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빽빽하게 채운채 길을 건너는 진풍경도 볼 수 있다. 

술집 하나 없는 밤거리가 차량과 인파로 가득한 걸 보고 느끼는 놀라움은 뒤이어 의아함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편도 네 개의 차선 중 인도와 접한 차선은 불법 주정차 차량으로 메워져 있고 나머지 세 개의 차선엔 차량이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락션 소리는 뜸하기 때문이다. 옆 차선에서 무리하게 끼어드는 차량에도 대개 선뜻 양보를 한다. 몇 블럭 건너 테헤란로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클락션은 물론이고 욕설이 난무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선 교통 정리를 하는 모범운전자들의 호각 소리가 들릴 뿐이다. 

길을 걷는 이들은 대부분 앳된 얼굴의 십대들이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나이는 제각각이지만 모두가 큰 백팩을 매고 있다. 아이들의 옷차림새도 비슷하다. 무채색 계열의 겉옷을 입은 아이들은 사거리를 둘러싼 건물들에서 쏟아져나와 거리를 바삐 걷다가 정차된 승용차로, 버스 안으로 빠르게 사라진다. 삼십 분쯤 시간이 지나면 군중과 차량은 썰물처럼 사거리를 빠져 나가고 거리도 한산해진다. 

몇 달 전부터 일주일에 두어 번씩 아들을 데리러 이곳에 간다. 밤 열 시에 이 거리를 지나본 적이 없었기에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나도 주변의 풍경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처음 몇 번은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뒷골목을 뱅뱅 돌아야 했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어느 골목에 빈 자리가 있는지를 대략 파악하게 되었다. 편의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차를 세우는 게 좋다. 대개는 간식으로 아들이 좋아하는 초코빵 같은 걸 가져가지만, 준비해가지 못하는 날엔 편의점에서 먹을 거리를 사야하기 때문이다. 

아들의 편의점 최애 간식은 스팸마요 삼각김밥이다. 그런데 학원에서 몰려나온 아이들로 북적이는 열시 십분 쯤 편의점 매대 삼각김밥 코너는 대개 텅 비어있다. 삼각김밥을 사지 못한 날은 아쉬운대로 핫도그를 산다. 계산을 하며 편의점 안을 둘러본다. 테이블은 컵라면을 먹는 아이들의 차지다. 자주 가다 보니 이제 익숙한 얼굴도 보인다. 처음엔 밤늦은 시간에 편의점 컵라면을 먹는 아이들이 좀 안돼보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지금 이 시간이 아이들에겐 나름 위안이 될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비어있는 배를 채우든 마음을 채우든, 채울 수 있다면 좋은 것 아니겠는가. 옆에 선 아재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든말든 아이들은 그저 컵라면과 삼각김밥, 닭꼬치와 핫도그를 꾸역꾸역 바쁘게 입에 넣는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내가 '대치동 라이딩'을 하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사교육에 열심인 편이 아닌데다 대치동이 상징하는 사교육 시스템의 꼭짓점을 바라보는 내 시선도 그리 곱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변엔 아이들이 커가면서 대치동으로 이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곳은 살고 싶은 동네라기 보다는 유익한 동네였고, 유익함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할 댓가는 컸다. 어떤 이는 대출을 받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멀쩡히 살던 자기 집을 두고 낡고 좁은 아파트 전세로 가기도 했다.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속으로 혀를 차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대치동을 통해 드러나는 날선 욕망을 은근히 폄하했던 것도 사실이다. 세상 물정 하나 모르고 그저 고고한 척 하는 선비처럼. 하지만 아들이 중학교에 가고, 입시 현실에 대해 좀더 알게 되면서 그런 생각도 좀 줄어든 것 같다. 대치동으로 이사를 가진 않았지만 라이딩을 하고 있으니 서투른 고고함도 절반쯤은 내려놓은 셈인가. 정지 신호에 줄지어 멈춰선 차량의 후미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거리 정지 신호로 서행하는 차선에서 검은 세단이 갑자기 앞으로 끼어들어서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한 차선을 더 건너가 비상등을 켜고 선 세단 옆으로 회색 후드티에 백팩을 맨 여학생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냉큼 올라탄다. 막히는 거리에서 클락션 소음이 뜸한 건 서로가 서로의 사정을 어느정도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뚤어진 것은 사회와 시스템이지 사람들이 아니다. 

수학 수업은 일주일에 세 번이다. 아들은 학원에 갈 때는 버스를 탄다. 밤엔 회의나 모임이 있는 날이 아니면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내가 데리러 간다. 셈을 해보니 그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라이딩을 했던 것 같다. 집에서 은마아파트 사거리까진 이십 분 정도 걸리니 아주 먼 거리는 아니다. 라이딩이 힘들어 대치동으로 이사간다는 말도 있는데 내겐 그리 힘들지 않다.(물론 매일 라이딩을 해야 한다면 상황이 다를 것이다.) 오히려 조금은 즐겁고 설레기도 하다. 집에 오는 동안은 온전히 아들과 둘만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차 안에선 평소에 듣지 못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다. 새로 전학을 온 친구나 얼마 전 시작한 동아리 활동에 대해 들은 것도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였다. 어떤 날은 돌아오는 내내 별다른 대화 없이 아들이 선곡한 음악만 듣기도 하는데 그것도 좋다. 요즘은 학원 앞에서 함께 탕후루를 하나씩 사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1991년, 고등학교 3학년 일 년 동안 학교 기숙사에 있었다. 통학이 어려워서는 아니었다. 그때는 원하는 3학년을 대상으로 기숙사를 운영하는 지방의 고등학교들이 꽤 있었다. 요즘 학교 기숙사와는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열악한 시설이었지만 공부에 집중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주중엔 기숙사에서 생활하다 토요일에 빨랫감을 싸들고 집에 갔다. 기숙사에 있는 다른 친구들은 주말이 되어야 부모님을 만났지만, 나는 매일 어머니를 만났다. 오후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어머니가 학교에 오셨기 때문이다. 휴대폰도 삐삐도 없던 시절이라 매일 같은 시간에 맞춰 어머니를 만나러 나갔다. 어머니는 항상 먼저 와 약속 장소인 운동장 구석에서 나를 반기셨다. 여름엔 토마토를 갈아 만든 쥬스를, 다른 계절엔 곰국을 보온병에 담아 오셨고 나는 화단을 둘러싼 큰 돌에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보온병에 담긴 내용물을 홀짝였다. 기껏해야 쉬는 시간 십여 분이 전부였지만, 어머니는 그 시간을 위해 매일 택시를 타셨다. 집에 자가용이 없던 때라 택시를 이용했고 혼자 왕복했다는 게 다를 뿐, 내 어머니도 수험생 아들을 위해 매일 라이딩을 하신 셈이다. 

얼마 전 아들과 집에 오는 길에 할머니의 라이딩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일 년 동안 매일 택시를 타고 학교에 왔다 가셨다고 하니 아들이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셨대?"

"그냥. 그게 할머니의 마음이셨던 거지." 

잠깐동안 말이 없던 아들이 한마디 했다. 

"조금 감동이네." 

그날 돌아오는 길에 아들이 좋아하는 뉴진스의 신곡을 실시간으로 함께 들었다. 라이딩을 하다 보면 이런 소소한 즐거움도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반복해 노래를 들으며 아들과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아들은 곧 잊어버리겠지만, 내게 둘이서 처음으로 이 노래를 함께 들었던 기억은 오래 갈 것이다. 

삼십 년 전 무덥던 여름날, 보온병을 안고 에어컨도 시원치 않은 작은 택시를 타고 오면서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그땐 몰랐지만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때 운동장 구석에서 어머니와 나눈 이야기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역시 특별한 이야긴 아니었으리라. 행여 수험 생활로 쌓인 짜증을 괜히 어머니께 쏟아놓거나 심통을 내진 않았을까. 그것도 알 수는 없지만 내가 어머니와 함께 했던 찰나의 시간들이 어머니에게도 설렘과 즐거움, 그리고 오래 되새길 수 있는 기억을 남겨드렸기를 바랄 뿐이다.

2023년 6월 11일 일요일

당신의 건강 문해력은 안녕한가요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를 달군 이슈 중 하나는 문해력에 대한 것이다. 작년에 있었던 ‘심심한 사과’ 논란이 그 예이다. 어느 웹툰 작가의 사인회를 준비하던 카페 측에서 예약 과정의 불편에 대해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는 글을 올렸는데, 일부 누리꾼들이 '마음의 표현 정도가 깊고 간절하다'란 뜻의 심심(甚深)이란 단어를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는 뜻으로 오해하고 사과에 성의가 없다며 주최측을 비난한 것이다.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디지털 세대의 낮은 문해력을 개탄하는 이들이 많았다.

해프닝 정도로 넘길 일이 논란이 된 이유는 이전에도 비슷한 일들이 있어서였다. 몇 년 전 영화 ‘기생충’ 개봉 당시엔 어느 평론가의 한 줄 평이 화제가 되었다.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라는 평에 대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겠다, 너무 현학적이다, 꼭 어려운 단어를 써서 잘난 체를 해야 하느냐며 SNS와 게시판을 통해 불만을 제기한 이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평론의 내용보다 단어의 어려움이 화제가 되는 상황의 배경에 낮은 문해력이 있다고 해석하는 의견이 많았다. 제작년엔 정치권에서 모 당대표가 다른 당의 대표에게 ‘무운을 빈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를 운이 없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잘못 이해하고 논평을 한 방송사 기자가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같은 해엔 ‘사흘’ 논란도 있었다. 토요일인 광복절부터 월요일 임시 공휴일까지 사흘 연휴가 이어진다는 신문 기사에 대해 순 우리말인 ‘사흘’의 뜻을 4일로 착각한 이들이 “3일인데 왜 사흘이라고 쓰냐”는 댓글 항의를 올렸던 것이다. 덕분에 ‘사흘’이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비슷한 사례로 모레 다음날을 의미하는 ‘글피’의 뜻을 모르거나 ‘금일’을 금요일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문해력, 영어로 리터러시(literacy)는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위의 사례들은 단어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생긴 일들이지만, 단어가 모여 문장이 되고 문장이 모여 단락과 맥락을 이루니 결국 이해의 문제는 단어에만 머물진 않을 것이다. 비슷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한국인의 낮은 문해력을 지적하는 의견이 단골처럼 등장한다. 문맹률이 낮기로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글을 읽고 이해하는 문해력은 점점 나빠지고 있으며, 특히 청소년과 젊은 세대에서 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 반면에 일부 전문가들은 청소년의 문해력이 낮다는 진단은 성인 중심의 시각이고 문해력 논란도 과장되었다고 반박한다. 요즘 세대가 영상과 멀티미디어에 대한 이해 능력은 훨씬 높으며, 디지털 시대에서 문자 위주의 텍스트를 이전보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문해력이 낮다고 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온라인 공간에서 오가는 요즘 아이들의 신조어를 외계어처럼 받아들이는 어른들을 보면 틀린 말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문해력 문제의 심각성을 보는 시각은 이렇게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전반적인 문해력 수준이 과거에 비해 낮아졌다는 점에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동의하는 것 같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와 같이 객관적으로 문해력을 평가하는 점수도 낮아지는 추세이다. 초중고 교사들 역시 학생들의 문해력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교과서나 긴 지문을 읽기 버거워한다는 것이다. 대학도 예외는 아니어서 길고 복잡한 글의 맥락을 파악하고 글로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글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강의가 보편화된지 오래이다. 서울대에서는 작년부터 전체 신입생을 대상으로 글쓰기 평가를 시행해왔는데 올해 시험의 경우 3명 중 1명이 미달에 해당하는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문해력과 관련된 논란이 반복되자 작년엔 대통령까지 나서 국무회의에서 “전 세대에 걸쳐 디지털 문해력을 높일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제공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바야흐로 국민의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국가가 걱정하는 상황이 된 것인데,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쎄 어린 백셩을 어엿비너긴’ 세종 시대 이후 육백 년 만의 일이 아닐까 싶다.

위에서 언급한 디지털 문해력은 스마트폰 등장 이전엔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이다. 과거엔 문자로 된 글을 두고 문해력을 이야기했지만, 요즘 문해력은 단순히 단어와 문장의 뜻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넓은 의미를 포함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문자 외에 이미지나 동영상 등 다양한 형태의 텍스트를 접한다. 그러다 보니 문해력도 컴퓨터 문해력, 미디어 문해력, 정보 문해력, 수 문해력, 과학 문해력 등 대상에 따라 다양하게 세분화된다. 이어서 이야기할 건강 문해력도 그 중 하나이다.

헬스 리터러시라고도 불리는 건강 문해력은 ‘건강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말한다. 건강 정보를 제대로 읽고 판단하지 못하면 자칫 건강에 해를 끼칠 행동을 할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메탄올을 마시면 감염을 막을 수 있다는 가짜 정보가 돌면서 실제 메탄올을 마셔 전세계적으로 수백 명이 사망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국내에서도 감염을 예방한다며 신도들의 입에 소금물 스프레이를 뿌린 종교 시설에서 집단 감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국제 기구와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일찍부터 건강 문해력 향상을 국가 보건 정책의 주요 의제로 채택하고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2021년 국내 성인 950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건강 문해력이 ‘적정’ 수준으로 나온 응답자는 전체의 50.6%, ‘경계’수준은 20.1%, ‘부족’수준은 29.3%였다. 자신에게 필요한 건강 정보를 적절히 찾고 이해할 수 있는 성인이 절반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한국의료패널 부가 조사) 특히 고령자와 취약 계층에서 문해력 점수가 낮았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건강 문해력이 더 낮은 사람들에게는 적절한 교육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실제로 교육부에서 성인 문해 교육 활성화 지원 사업을 하고 있고, 일부 지자체에서는 자체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아직까진 충분치 않지만 대통령도 문해력을 높일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지시했으니 앞으로 더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런데 교육 외에 도움이 될 만한 다른 방법은 없을까.

고혈압으로 진료를 받던 환자가 있었다. 그는 서너 달에 한 번씩 진료실을 찾았고, 그날도 여느 때처럼 혈압을 확인하고 약을 처방하려는데 그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건강검진 결과를 받았는데 B형 간염 검사 항목에 이상이 있다는 것이었다. 결과지를 살펴보니 B형 간염 항원은 음성, 항체는 양성이었다. 문제될 것이 없는 결과라 뭐가 이상한지 되물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항체 검사 결과의 양성이란 단어를 보고 이상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오래 전 부친이 간경변을 앓다가 돌아가셨는데 자신도 B형 간염이 생긴 줄 알고 며칠 동안 속앓이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 병원에 온 김에 검사를 다시 받아보려 했다는 것이다. 같은 양성이라도 항원과 달리 항체 양성은 면역이 있다는 뜻이며, 향후에도 B형 간염에 걸릴 위험은 없다고 설명하니 그제서야 얼굴빛이 밝아졌다. 검사를 받지 않아도 되었음은 물론이다.

B형 간염 항원과 항체 양성의 경우처럼, 양성(positive)과 음성(negative)은 검사 항목에 따라 긍정적인 결과가 되기도 하고 부정적인 결과가 되기도 한다. 같은 간염이라도 B형 간염은 ‘항체 양성’이 면역이 있다는 뜻이지만 C형 간염에선 반대로 병이 있어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더 나아가면 ‘악성(malignant)’의 반대말인 ‘양성(benign)’도 있다. 악성 종양, 양성 종양이 예이다. 양성이란 단어만큼 흔히, 그리고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 의학 용어도 없을 것이다. 이쯤 되면 일반인 입장에선 헷갈릴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덕분에 그나마 ‘검사 양성’의 의미를 알게 된 사람이 많아지긴 했다. 하지만 건강 검진 결과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양성’의 의미를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헷갈리는 환자들을 볼 때마다 악성의 반대말이라도 다른 용어를 사용했다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종종 느낀다. 애초에 더 나은 용어를 썼다면 좋겠지만, 당장 용어를 바꿀 수 없다면 그 의미를 좀더 자세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전 국민이 건강 검진을 받게 되면서 과거엔 의사의 설명을 통해서만 듣던 검사 결과를 직접 접하게 되는 일도 많아졌다. 의료진의 설명 없이 달랑 결과지만 받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다 보니 검사 결과에 이상이 없는데도 괜한 걱정을 하거나, 반대로 이상이 의심되는데도 꼭 필요한 후속 검사나 진료를 받지 않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사실 많은 검사 결과가 담긴 결과지를 혼자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직장인 1000여명에게 조사한 결과 건강 검진 결과지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답한 응답자가 71%나 되었다고 한다.(2020년 리치플래닛 조사) 수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는데다 어려운 전문 용어가 많아 검사 결과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건강 검진 결과에 대해 의사의 설명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건강 검진 결과지는 일반인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친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민의 문해력을 높이는 교육은 중요하다. 하지만 건강 정보의 경우엔 그보다 먼저 국민의 문해력 수준에 맞는 정보를 만드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건강 검진 결과지도, 온라인 건강 정보도 보다 친절해질 필요가 있다. 질병관리청의 국민건강포털이나 대학 병원 홈페이지 등 정확한 정보를 담은 플랫폼은 이전보다 늘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 담긴 정보들은 여전히 어려운 구석이 많으며,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한 노력이 더 필요하다. 정확하고 어려운 정보보다 부정확하고 쉬운 정보가 대중에게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참고

한국인 '건강 문해력' 어느 정도?…"성인 절반만이 '적정' 수준"

https://www.yna.co.kr/view/AKR20230304027400530

"직장인 71%, 건강검진 결과지 충분히 이해 못 해"

https://ebn.co.kr/news/view/1027995

 

2023년 5월 13일 토요일

ChatGPT, 유튜브, 건강 정보

챗지피티(ChatGPT)가 화제다. 미국의 스타트업 기업 오픈에이아이가 개발한 대화형 인공지능 챗봇으로, 지난해 11월 출시 후 겨우 두 달 만에 사용자 수가 1억명을 넘겼다고 한다. 이 챗봇에 대한 뉴스 기사, 책, 논문이 쏟아지고 있다. 인기를 넘어 가히 열풍이라 불릴만하다. 어마어마한 양의 자료를 학습한 덕분에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점이 특징인데, 기껏해야 단답형이나 정형화된 답변 정도를 할 수 있는 기존의 챗봇과는 달리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능하다. 이전 대화 내용을 기억해 맥락을 이해할 수도 있고, 질문을 그저 알아듣는 수준이 아니라 웬만한 전문 영역에서까지 그럴듯한 답을 내놓아 기존의 챗봇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경험을 선사한다.

나도 챗지피티와 몇 번 대화를 나눠보았다. 중학생 아들에게 적당한 생일 선물을 알려달라고 하니 게임 콘솔, 자전거, 악기, 책, 스포츠 용품 등을 추천했다. 십대 남자 아이를 위한 무난한 답변인데, 아이의 관심사와 성격을 고려해야 한다는 조언도 빼놓지 않았다. 러닝할 때 들을 한 시간짜리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에는 스무 곡짜리 리스트를 뚝딱 내놓았다. 이중 몇 곡은 내 스마트폰의 리스트에도 추가해 종종 듣고 있다.

조금 더 전문적인 요구도 해보았다. 미국, 영국, 한국의 의료 제도를 비교해달라는 요청에 한 장 남짓 분량의 요약문을 깔끔하게 만들어냈다. 리포트를 보니 무턱대고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세 나라 제도의 특성과 핵심을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체적인 예시를 포함해 이천 단어 분량으로 좀더 긴 글을 요구했다. 그러자 미국의 경우엔 오바마 케어를 둘러싼 논란을, 영국의 경우엔 관절 치환술과 같은 수술을 받기까지의 오랜 대기 기간을 문제점으로 꼽았다. 한국에 대해선 코로나 팬데믹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던 배경에 고유의 의료 제도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학부 리포트 정도론 충분한 수준이었다. 온라인에선 챗지피티를 사용한 이들의 경험담이 넘쳐난다. 논문 초록이나 서론을 특정 저널의 형식에 맞춰 그럴듯하게 작성해 주더라는 후기도 찾을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교육계와 학계에서도 챗지피티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과제에 챗지피티를 이용하는 것을 금지하거나 인공지능 활용에 대한 지침을 마련한 학교가 늘고 있고, 네이처나 사이언스와 같은 유명 저널은 챗지피티를 저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임상 의학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최근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서는 챗지피티 활용에 있어서 장점과 한계에 대한 특별 기고를 발표하기도 했다.  

챗지피티는 생성형 인공지능(Generative AI)에 속한다. 챗지피티 열풍의 핵심은 이용자의 요구에 따라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내는 이 생성 능력에 있다. 하지만 놀라운 능력 이면에는 그림자도 있는데, 바로 ‘환각(hallucination)’이라 부르는 문제다. 인공지능이 모르는 질문에 대한 답변도 아는 척 그럴듯하게 만들어내는 현상을 일컫는 용어이다. 세종대왕이 맥북 프로를 던진 사건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알려달라는 황당한 질문에 실제 한글 창제 과정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라고 답을 한 사례는 유명하다. 현재 한국 대통령을 묻는 질문도 환각의 대표적인 예다. 2021년 자료까지만 학습한 챗지피티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함에도 종종 틀린 답을 천연덕스럽게 내놓는다. 

이러한 사례를 고려하면 아직까지 챗지피티를 정보 검색 용도로 쓰기엔 한계가 있어 보이지만, 언젠가는 인공지능을 이용한 검색이 대세가 될지도 모른다. 최근엔 마이크로소프트가 챗지피티의 최신 언어 모델 GPT-4를 탑재한 새로운 빙을 내놓고 구글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다. 구글도 생성형 인공지능을 이용한 검색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다 하니 두 공룡 기업의 싸움이 어떻게 진행될지 흥미롭다. 두 기업의 생성형 인공지능 중 어느 쪽이 승자가 될지는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검색 시장에서 구글의 영향력이 더 강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바로 유튜브 때문이다.

작년에 아들의 자전거를 새로 사면서 자전거를 자주 타는 동료에게 자전거 모델 추천을 부탁했다.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던 그가 말했다. “유튜브도 한번 찾아보세요. 요즘은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많아서 유튜브에 정보가 다 있습니다.” 유튜브로 검색을 한다고? 검색 하면 자연스레 구글이나 네이버를 떠올리는 나로선 낯선 경험이었다. 그런데 찾아보니 실제 유용한 정보가 많았다. 요즘 유행하는 자전거 모델, 자전거를 살 때 주의할 점, 구입 후기와 사용기 등 초보에게 필요한 콘텐츠도 충분했다.

직접 검색을 해보니 왜 유튜브를 이용하는지 이내 알 수 있었다. 동영상은 텍스트나 이미지에 비해 이해하기 쉽고 기억에도 오래 남았다. 자전거를 고를 때만 그럴까. ‘강남역 맛집’, ‘부산 여행’, ‘스파게티 만들기’ 등의 검색어를 입력할 때 네이버나 구글, 그리고 유튜브 중 어느 쪽이 더 생생한 정보를 줄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자. 제품 사용기, 여행기, 요리, 맛집 후기 등 사용자 경험에 기반한 정보라면 동영상이 주는 장점이 클 것이다. 영화나 미술, 게임과 같은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이다. 유튜브에는 신작 영화나 게임 스토리를 요약한 십여 분짜리 영상이 넘쳐난다. 젊은 연령일수록 유튜브를 더 많이 이용한다고 하니 유튜브의 영향력은 점점 커질 것이다.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는 중학생 내 아들만 해도 검색을 위해 초록색 테두리 창이 아닌 붉은색 유튜브 아이콘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검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 중에 건강에 대한 내용을 빼놓을 수 없다. 의료는 전문성이 높고 학문의 발전 속도가 빨라 공급자와 소비자 간에 정보의 비대칭이 가장 심한 분야이다. 환자 입장에선 이 의사의 말이 맞는지 틀린지, 이 병원과 저 병원 중 어떤 병원이 더 나은 진료를 하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진다. 미국의 조사에 따르면 환자 네 명 중 세 명이 자신의 질병에 대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온라인 정보를 이용했다. 최근 국내 조사에서도 국민 열 명 중 일곱 명이 인터넷을 통해 건강 정보를 얻는다고 답했다(과기정통부 2021년 인터넷이용실태조사). 이는 팬데믹을 거치며 크게 증가한 수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건강 정보를 찾지만 막상 그 정보가 얼마나 정확한지 판단하기란 역시 어렵고 잘못된 정보를 만나는 경우도 많다.

국가 기관이나 대학 병원의 정보라면 대개 믿을만하지만 난이도가 문제이다. 건강 정보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헬스 리터러시(health literacy)라고 하는데, 2020년 조사에서 적정 수준의 헬스 리터러시를 지닌 사람은 우리 국민의 29.1%에 불과했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건강 정보에 대한 일반인의 이해 수준이 낮은 만큼 정보의 내용도 이에 맞추어야 하겠지만 그게 만만치 않다. 

몇 년 전 질병관리청의 국가건강정보포털 원고를 집필한 적이 있다. 국민에게 질병이나 증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웹사이트로, 유용한 정보가 많다. 이 포털의 원고 집필 지침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초등학교 고학년 눈높이에 맞추도록 하는데 이렇게 쓰는 것이 보통 고민스런 일이 아니었다. 의학 용어 하나, 표현 하나도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 써야 했다. 나를 비롯한 모든 집필진이 비슷한 고민을 했겠지만 정보들이 이용자의 눈높이에 충분히 맞추어져 있는지는 의문이다. 전문가라 해도 의학 지식의 양과 그 지식을 일반 대중에게 전달하는 능력은 비례하지 않기 때문이다. 

텍스트 형식에 비해 동영상은 쉽고 친근하며 정보 전달력도 높다. 이런 장점은 딱딱한 의학 지식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빛을 발한다. 이러한 이유로 건강 정보를 검색하는 플랫폼으로서 유튜브의 역할도 점점 커지고 있다. 유튜브의 인기가 높다 보니 학회, 대학 병원은 물론 웬만한 종합 병원들도 홍보와 정보 전달 목적으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한다. 의사 중에서도 유명 유튜버가 많다. 비의료인이 운영하는 구독자 수십만의 채널들도 있다. 그렇다면 이들 채널의 정보는 얼마나 정확할까. 

캐나다 연구진에 따르면 코로나 19 관련 인기 있는 유튜브 컨텐츠를 분석한 결과 27.5%가 잘못된 정보를 담고 있었다. 국내 연구에서도 통풍에 대한 유튜브 컨텐츠를 검토한 결과 10개 중 3개의 컨텐츠가 잘못된 정보를 주거나 개인적 경험을 전달하는 수준으로 나타났다. 유용한 컨텐츠의 대부분은 통풍과 관련된 학회나 전문의가 제작한 것이었고, 반면에 비전문가의 컨텐츠는 잘못된 정보를 담은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영상에 대한 선호도는 정보의 정확성 여부와 관련이 없었고, 조회 수는 부정확한 컨텐츠가 오히려 높았다. 이 경우 검색 결과 부정확한 정보를 만나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유튜브 검색 알고리즘은 정확성보다는 컨텐츠의 인기나 과거 시청 패턴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유튜브에서 가짜 건강 정보를 피하기 위한 팁을 몇 가지 소개한다. 일단 의사가 만든 동영상을 선택하면 비교적 안전하다. 더 깐깐하게 고르자면 의사 개인 채널보다는 병원이나 학회의 채널이 낫다. 의사라고 해서 모두 맞는 말만 하진 않기 때문이다. 의사가 아닌 기타 무슨무슨 전문가나 박사 등의 채널은 적당히 거른다. 건강기능식품 쇼핑몰을 함께 운영하는 채널은 피하는 게 답이다. 추가로 ‘이것만 하면 된다’, ‘이건 큰일난다’거나, ‘무조건’, ‘반드시’ 등의 단어로 확신을 내뿜는 제목은 조회 수를 늘리기 위한 장치일 뿐이니 내용을 기대하지 말 것.

챗지피티에서 환각 현상과 같은 오류는 시간이 가면서 줄어들겠지만 유튜브에서 엉터리 건강 정보를 만나는 일이 줄어들지는 의문이다. 건강 정보의 경우 어느 영역보다도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격차가 큰데다, 유튜브 컨텐츠 생산자의 수입은 정보의 질이 아니라 구독자와 조회 수가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정확한 내용보다 구독자의 관심을 끌 만한 내용의 정보가 많이 만들어지고 유통될 수밖에 없다.

부정확한 정보가 문제가 되면서 유튜브에서는 의사들이 만든 컨텐츠를 상단에 배치하는 등 나름의 대응책을 마련해 왔다. 최근엔 대학 병원 중심으로 인증 기관을 선정하고 신뢰도가 높은 컨텐츠를 우선 노출시키는 ‘유튜브 헬스’ 서비스를 시작한다고 한다. 일단 환영할 일이지만 문제가 해결될지는 모르겠다. 정확한 정보가 아니라 조회 수를 올릴 수 있는 내용의 컨텐츠가 수익을 올리는 구조는 그대로일 테니 말이다.


참고문헌

Osman W, Mohamed F, Elhassan M, Shoufan A. Is YouTube a reliable source of health-related information? A systematic review. BMC Med Educ. 2022 May 19;22(1):382. 

Koo BS, Kim D, Jun JB. Reliability and Quality of Korean YouTube Videos for Education Regarding Gout. J Korean Med Sci. 2021 Nov;36(45):e303.

‘의료 괴담’은 그만…유튜브, 의학 콘텐츠 인증제 도입

https://www.hani.co.kr/arti/economy/it/1077061.html

2023년 4월 6일 목요일

러닝 일기

러닝을 한 지는 꽤 오래 되었다. 이전엔 트레드밀을 이용했다. 실외 러닝을 시작한 때는 코로나가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던 해였다. 일주일에 한두 번, 집을 나서 한강을 건너 돌아오는 4킬로미터 남짓 코스였다. 그때는 강 위를 달리는 순간이 그저 마음에 들었을 뿐이고, 속도나 기록에 대해선 신경쓰지 않았다.

미국에서 보낸 한해 동안엔 좀더 자주 뛰었다. 집에서 출발해 집 근처 공원을 돌고 돌아오곤 했다. 공원을 몇 바퀴 도느냐에 따라 거리가 달랐다. 짧게는 2마일, 길게는 3마일 정도의 코스였다. 뛰다 걷다 하는 식으로 산책하듯 했으므로 3마일이라 해도 그리 힘들진 않았다.

지난해 한국에 돌아와 몇 개월 동안엔 운동을 하지 못했다. 여름이 되면서 다시 러닝을 시작했다. 집에서 출발해 성내천 뚝방길을 두 번쯤 왕복하면 딱 3킬로미터가 나왔다. 두어 달쯤 그렇게 하다 보니 거리를 좀더 늘려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뚝방길은 한강 공원까지 이어져 있다. 그곳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코스로, 조금씩 거리를 늘려 가을쯤엔 6킬로미터까지 뛰곤 했다. 거리가 늘다 보니 10킬로미터를 뛰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거리에 대한 목표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역시 기록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땐 킬로미터당 6-7분 정도의 스피드로 달렸던 것 같다. 

그러다 11월에 갑상선 항진증이 찾아왔고, 운동을 할 수 없는 컨디션이 되었다. 약을 먹으며 갑상선 호르몬 수치가 안정이 될 때까지 두어 달 동안 러닝도 쉬었다. 올 초에 다시 운동화를 신고 늘 뛰던 길에 나갔을 때는 체력이 작년보다도 못하게 회귀한 상태였다. 3킬로미터를 뛰는데도 힘에 부쳐서 허덕거렸다. 그래도 한달 정도 지나니 다시 안정이 되었고, 지난 달부턴 다시 거리를 늘려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 목표였던 10킬로미터까지 늘려보기로 했다. 내친김에 속도도 좀더 높여보면 어떨까. 킬로미터당 6분 이내 까지는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10킬로미터를 6분 페이스로 달리면 1시간이 걸린다. 1시간 내에 10킬로미터를 완주하는 것이 목표였다. 러닝에 익숙한 이들에겐 별것 아닌 기록이겠지만, 그동안 10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뛰어본 적도 없었던 내게는 쉽지 않은 숫자였다.

그리고 어젯밤, 그동안 생각만 했던 목표에 다다랐다. 



2023년 3월 4일 토요일

영화 '다음 소희'를 보았다.

일주일 전 나는 베를린에 있었다. 베를린을 찾는 관광객이라면 모두가 한 번은 들른다는 브란덴브루크문 광장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옛 동독의 영토였던 광장에서 프로이센군의 개선문이었던 브란덴브루크문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은 뒤 광장 옆의 홀로코스트 기념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식 명칭은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로, 높이가 다른 직육면체 돌들이 빽빽이 들어선 공간이다. 돌들은 마치 관이나 비석처럼 보여서 중앙의 키보다 높은 돌들 사이를 지날 때는 압도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 느낌은 유대인 학살의 기록으로 가득한 지하 기념관을 둘러보는 내내 이어졌다. 거리로 나와 바깥 공기를 쐬고서야 답답함을 떨칠 수 있었다. 이월의 바람이 아직 찼다. 우울한 기운을 내치듯 일부러 크게 심호흡을 했다.

기념관의 남쪽 경계는 한나 아렌트 거리라 이름붙은 길이다. 나치를 피해 고국인 독일을 버렸던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을 통해 악인은 생각보다 평범하고 흔히 행하는 일도 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웠다. 그는 "그런 악한 행위는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못한 데서 나온다"고 했다. 자신에 대한 성찰과 비판적 사고가 없다면 상황에 따라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평론가 신형철이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썼던 다음의 문구도 비슷한 깨달음을 준다.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현장 실습생의 사망 사건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가장 최근은 2021년 여수에서 요트 바닥 청소를 하던 고등학생이 익사한 사건이었던 것 같다.(기사를 찾아 연도를 확인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기 전엔 현장 실습을 둘러싼 문제를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저 일부 업체의 문제 정도로 생각하고 아이의 죽음을 적당히 안타까워 하며 넘겼을 뿐이다. 영화를 보고서야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대부분의 사고가 그렇듯, 문제는 구조적이고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현장 실습생을 저렴한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회사, 실습을 보내는 데만 급급한 학교, 평가를 소홀히 한 교육부, 관리 감독을 외면한 고용노동부 모두가 가해자였다. 하지만 등장 인물 중 누구도 대단한 악인이라 할 만한 사람은 없다. 모두가 평범한, '복잡하게 나쁜' 사람들이다. 콜센터는 실적을 이유로, 교육부와 학교는 취업률을 이유로 아이들을 구석으로 내몰았다. 사실 이런 건 우리 모두에게 퍽 익숙한 평가 잣대들 아니던가. 책임을 묻는다면 모두가 그저 자기 일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항변할 것이다.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며 따져 묻는 형사에게 교육부 장학사는 이것이 현실이라고, 벽면 가득한 취업률 평가 도표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적당히 좀 하십시다."

영화를 보며 소희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는 어른이 없었다는 점이 가슴 아팠다. 부모, 선생님, 회사 상사, 어느 누구도 소희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나 회사 그만둘까, 하는 소희의 말은 부모 앞에서도 혼잣말이 될 뿐이다. 아이의 말을 들어준다고 현실이 달라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누군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꽃같은 아이의 죽음은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소희의 옆엔 친구들이 있었지만 그들만으론 부족하다. 정글같은 사회를 살아내려면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어른이 꼭 필요한 것이다.

얼마 전 김장하 선생의 다큐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반면에 나는 살면서 무엇을 했는가 하는 생각에 부끄럽기도 했다. 법적으로 어른이 된 지 삼십 년이 되었지만 다큐를 보는 내내 내가 어른이란 확신이 들지 않아 자괴감도 들었다. 선생의 발끝을 따라가기도 어려울 것이나, 그래도 내 입장에서 어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곳에서,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어른의 역할을 조금은 할 수 있겠다는. 그리고 어른을 필요로 하는 순간과 장소를 지나치거나 외면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겠다는. 애쓰지 않는다면 금새 잊을 것이다. 나 역시 복잡하게 나쁜, 평범한 사람일 뿐이니.

콜센터 근무 환경이나 현장 실습생 제도의 문제점이 제기되면서 조금은 변화도 있었다. 문제를 외면하지 않으려는 어른들의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한 걸로 보인다. 아이들의 죽음은 해를 거르지 않고 반복된다. 그러니 소희가 일했던 콜센터가 지금도 어디에나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영화를 보고 일주일 전 베를린에서의 시간을 떠올리게 된 건 홀로코스트 기념관 안에 적혀있던 문구 때문이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의 말이 그것이다.

"It happened therefore it can happen again: this is the core of what we have to say."

2023년 3월 2일 목요일

음식은 약이 아니다

오십대 남자 환자에게 검사 결과를 설명하던 중이었다. 혈당 수치 오른쪽에 정상 범위보다 높음을 의미하는 붉은색 화살표가 선명했다. 

“혈당이 높습니다. 작년보다 더 높아졌어요. 지금 수치는 당뇨병에 해당합니다.”  

공복 혈당 장애라 불리는 당뇨병 전 단계에 접어든 지도 벌써 몇 년 되었으니 당뇨병을 조심하라는 이야기도 되풀이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도통 처음 듣는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뇨병이 온 건 아니겠지요?”

일찍이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죽음을 앞둔 사람이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다섯 단계 감정을 차례로 겪는다고 했다. 죽음의 경우만큼 강렬하진 않겠지만 만성 질환을 처음 진단받은 환자도 비슷한 감정의 수순을 거친다. 지금은 그중 첫 번째인 부정 단계라 할 수 있다. 환자들은 대개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는 그와 눈을 맞추고 천천히 설명했다. 

“아뇨. 당뇨병이 온 겁니다. 이제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미죠.”

“제 가족 중에 당뇨병 환자도 없는데 왜 저만 당뇨병이 생겼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의 언성이 약간 높아졌다. 두 번째, 분노의 단계다.

“유전적인 원인 외에도 다른 여러 원인들이 있고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내게 왜 당뇨병이 생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요. 사실 지금은 왜 당뇨병에 걸렸는지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가 더 중요합니다.”

“그럼 이제 약을 먹어야 하나요? 당뇨병 약을 먹기 시작하면 평생 먹어야 한다고 들었는데요.”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죠. 하지만 당뇨병 초기이고 심하지 않은 상태니 먼저 생활 습관을 바꿔서 조절해 봅시다. 변화가 없으면 약을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침울한 표정을 짓던 그가 조금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뇨병을 처음 진단받은 환자 대부분은 평생 약을 먹기를 부담스러워 한다.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그럼 당뇨병이 생기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요?”

우울과 타협 단계. 다섯 단계 감정이 반드시 순서대로 찾아오지는 않는다. 중간 단계를 건너뛰기도 하고 타협을 했다가 다시 분노 단계로 돌아가기도 한다. 지금은 잠시 앓고 지나갈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 병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자연스레 마지막 단계인 수용에 이를 것이다. 그때까지는 해야할 일을 구체적으로 알려줄 필요가 있다.

“운동은 걷기를 하고 계시니 조금 더 늘려보지요. 속보로, 숨이 차고 땀이 날 정도로 강도를 높여서 빨리 걷는 게 좋습니다. 매일, 최소한 일주일에 다섯 번 이상은 해야 합니다.”

“펜을 빌릴 수 있을까요?”

모니터 옆 철제 펜꽂이에서 볼펜을 꺼내 환자에게 건넸다. 그는 혈당 검사 수치 옆에 방금 들은 말을 기록했다. 반듯한 글씨였다. 나는 그가 기록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다음은 체중 감량입니다. 한 달에 일 킬로그램씩. 석 달에 삼 킬로그램만 줄여보세요.”

그는 선생님의 강의를 요점 정리하는 학생처럼 볼펜을 부지런히 놀렸다. ‘체중 줄이기, 3킬로 / 3개월’이라 적고 앞쪽의 숫자 3에 동그라미를 두 번 그렸다. 

“마지막으로 식단입니다. 체중을 줄이려면 무엇보다 먹는 양을 줄여야 합니다. 지금 먹는 양에서 삼분의 일을 덜어내고 삼분의 이만 먹는다고 생각하세요. 단맛이 나고 당분이 많은 간식은 피하되, 무엇보다 골고루 드시는 게 중요합니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가 정중하게 물었다. 나는 설명을 멈추고 그의 질문을 기다렸다. 그의 얼굴에 기대 섞인 표정이 떠올랐다. 다음에 이어질 질문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뭘 먹으면 혈당이 내려갈까요? 당뇨병에 도움이 되는 식품 같은 게 없을까요?”

슬픈 예감은 항상 틀린 적이 없다. 이 질문은 만성 질환 환자와의 대화 중에 주로 타협 또는 수용 단계에서 등장한다. 내게는 어렸을 적 그림책에서 보았던 전래 동화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역시 나는 그 이야기를 떠올렸다. 

옛날 어느 마을에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효자가 있었다. 추운 겨울날, 어머니가 딸기를 먹고 싶다고 했다. 엄동설한에 딸기가 있을 리 만무했지만, 딸기를 먹으면 병이 나을 것 같다는 어머니의 말에 효심이 깊은 아들은 딸기를 구하기 위해 눈 덮인 산을 올랐다. 추위를 무릅쓰고 산 속을 헤매던 효자 앞에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그를 등에 태우고 딸기가 있는 곳에 데려다 주었다. 아들이 구해온 딸기를 먹은 어머니는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이야기는 여러 버전이 있어서 어떤 때는 효자가 효녀로, 호랑이가 산신령으로, 딸기가 봄나물이나 홍시로 바뀌기도 한다. 그래도 주된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호랑이를 감동시킨 효심은 놀랍지만 효심에 대한 설화는 많기에 이 이야기가 특별하진 않다. 내가 이 이야기를 떠올리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음식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이 흥미로워서이다. 한해 동안 병치레를 피하기 위해 대보름날에 오곡밥이나 부럼을 먹던 풍습을 보면 음식이 질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한다는 개념이 꽤나 오래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래 전 약도 의학 지식도 부족했던 시대엔 음식과 약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다. 당시엔 풀뿌리를 빻거나 나무 열매를 달여서 약으로 쓰기도 하고, 관절이 아픈데 좋다는 음식을 기침이나 두통에 쓰기도 했을 것이다. 우연이든 아니든 이렇게 만든 약을 먹고 어떤 이의 병세가 좋아졌다면 그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거나 책으로 쓰이기도 했을 것이다.

‘약식동원(藥食同源)’이라는 말이 있다. 약과 음식은 그 근본이 동일하다는 뜻으로, 기원전 중국 진한 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 의서 <황제내경>에 적힌 말이라 한다. 그러니 음식으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은 예수의 탄생만큼이나 오래된 셈이다. 조선 선조 때 허준이 집필한 <동의보감>에서도 같은 말을 찾을 수 있다. 중국과 한국 등 동양 의학에선 체질과 음식의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해서인지 음식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개념도 일찍부터 더 깊게 뿌리내렸던 것으로 보인다.(서양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 역시 비슷한 말을 했다는 설도 있지만 출처가 확실치 않다.) 쑥이나 냉이, 도라지, 더덕 등의 식재료는 한약재로도 알려져 있다. 심지어 이런 약재를 넣어 담근 술도 약(藥)주라고 부른다. 

음식과 관련된 믿음은 지금도 흔하다. 가끔 가는 동네 콩나물국밥 집 벽엔 메뉴판과 함께 염증을 억제하고 대사를 촉진한다는 콩나물의 놀라운 효능에 대한 설명이 걸려있다. 어떤 질병이든 좋다는 음식이 있다. 책이나 방송은 이를 되풀이해 재생산한다. 고향을 소개하는 다큐에서도, 자연인이 등장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도 어느 병에 좋다는 음식을 만들고 먹는 모습은 빠지지 않는다. 오죽하면잘 먹고 잘 사는 법이란 이름의 프로그램도 있었을까. 요즘은 유튜브가 한몫 한다. 조회수를 위한 자극적인 제목은 필수이다. 어떤 음식은 먹으면 큰일날 것처럼, 또 어떤 음식은 안 먹으면 큰일날 것처럼 말한다. 이 과정에선 종종 식품의 종류보다 구체적인 개별 식품이 강조된다. 그냥 채소보다는 브로컬리가, 그냥 견과류보다는 브라질너트가, 그냥 가금류보다는 오리고기가 특효라고 콕 집어 이야기하는 식이다. 당뇨병을 예로 들면 여주, 돼지감자, 노니, 누에 등, 스테디셀러만 해도 여러 가지이다. 다들 각각은 흠잡을 데 없는 음식이지만 따로 찾을 만큼 병을 치료하는 특출난 효과는 없다. 하지만 음식점 벽 메뉴에서까지 음식의 효험에 대한 과장된 설명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보니 진료실에선내가 어디가 안 좋은데 뭘 먹어야 좋아지느냐는 질문도 흔히 접한다. 건강기능식품의 과도한 인기 이면에도 음식이 약이 된다는 믿음이 자리잡고 있다.

물론 음식은 건강에 중요하다. 하지만 음식으로 모든 병을 치료할 수는 없다. 당뇨병과 같은 만성 질환 관리에 있어 식이 요법은 약물 치료 못지 않게 중요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식이는 개별 음식 한두 가지가 아니라 다양한 음식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식단 전체를 의미한다. 기존의 잘못된 식단은 그냥 두고 특정 음식만 더해 먹는다고 마법같은 변화가 생기진 않는다. 또한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그 음식만 과하게 먹으면 균형이 깨지거나 영양실조가 생긴다. 그러니 내 답을 기대하는 환자에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뇨병에 특효인 식품 같은 건 없습니다. 음식은 약이 아니에요.”